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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1.02 17:42 수정 : 2013.03.11 15:52

배 유리창으로 내다본 그림세이 전경. 최명애 제공

[매거진 esc] 수상한 북극
아이슬란드 그림세이섬

천천히 기분 좋게 흔들리기 시작하던 배는, 아이슬란드 ‘본토’가 천천히 멀어지면서 제대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2층 선실의 손바닥만한 창으로는 고래도, 물범도, 바다사자도, 바다코끼리도, 그 흔한 갈매기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창문을 때리는 파도밖에. 배는 정말로, 집채만한 파도를 뚫고 나아가고 있었다. 배의 진행 방향을 따라 직선으로 흔들리는 이 흔들림이 익숙하다 했더니, 놀이공원 바이킹이었다. 그 바이킹이 이 바이킹이었구나. 놀이공원이 즐거운 건 3분 뒤면 끝이 온다는 걸 알아서다. 우리의 배는 편도 3시간이었다.

놀이공원 아저씨는, 울면서 애원하면 세워라도 주겠지만, 이 배는 되돌릴 수도 없었다. 승객과의 약속 때문이 아니다. 대구 때문이다. 그림세이 섬과 아이슬란드를 하루 한 번 오가는 이 배는 그림세이 어부들이 잡아온 대구를 아이슬란드로 실어 나르는 수송선이었다. 여름의 끝자락, 잔뜩 흐리고 비 오는 아침. 이 배의 승객은 나와 일행, 단둘이었다. 육지에 상륙하면 어부로 변신할 준비가 돼 있는 선원 아저씨들은 흘끔흘끔 우리를 쳐다봤다. 쟤들은 뭘 하러 그림세이로 가는 걸까.

그게, 북극선이 그림세이를 지나고 있어서다. 적도를 기준으로 남회귀선과 북회귀선이 있는 것처럼, 북극점에서 23.5도를 내려온 곳에 북극선(arctic circle)이 지나간다. 그림세이의 북극선은 동네 교회 목사님 댁 침실의 침대 위를 정확히 지나가고 있다고 했다. 목사님은 북극선 이북에, 사모님은 북극선 이남에서 주무신다. 우리는 그 북극선을 보러 간 길이었다. 그걸 왜 보러 가느냐고 거듭 물으신다면, ‘한국인 일부의 미트콘드리아에서 노르웨이 어부의 염색체가 발견된다, 그게 나다’라고 주장하겠다. 그러나 내 먼 조상들께서는 안타깝게도 바이킹은 아니었고 연근해 어업에만 종사하신 모양이었다. 이 정도 파도도 이기지 못하는 유전자로는, 뭍이 나오면 배를 뒤집어쓰고 전진했다는 바이킹의 후예라고 우길 순 없는 것 아닌가.

3세기 같은 3시간이 흐르고, 그림세이에는 비바람이 퍼붓고 있었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선원 아저씨가 손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가 북극선인가 보다. 우리는 눈보라를 뚫고 한 발 한 발 묵묵히 전진했다. 바람이 너무 거세 발이 잘 옮겨지지 않았다. 간신히 도착한 북극선에는 교회는 간데없고 이정표만 서 있었다. 날리는 머리카락이 정확히 수평선과 평행을 이루는 가운데 깃대를 부둥켜안고 사진을 찍었다. 이따금 아이슬란드에 북극곰들이 떠내려온다는데, 걔들도 혹시 바람에 날려간 건가.

깃대에서 내려다본 마을은 조그마했다. 채 100명이 안 사는 마을, 식당도 한 곳, 카페도 한 곳, 슈퍼마켓도 하나다. 물기가 있는 곳마다 둥지를 틀고 있던 새들이 잽싸게 다가와 ‘가 가 가’ 가라며 머리 위에서 앵앵댔다. 여기는 북극, 너 같은 B급 어부의 후예가 올 곳이 아니라고. 그림세이는 북극 최고의 공격형 새, 사람 머리 따위는 서슴없이 쪼는 북극제비갈매기의 여름철 번식지다. 사람 같은 건 두렵지 않을 만하다. 북극제비갈매기의 회유 경로는 시시하게 오스트레일리아(호주)에서 알래스카, 이런 게 아니다. 매년 남극과 북극을 오간다. 이 진정한 북극의 ‘강자’가 우리 머리를 쪼기 전까지 북극선 ‘이남’의 배에 도착할 수 있을까. 바이킹 조상들은 그래서 뿔 달린 헬멧을 쓰셨나.

최명애 <북극 여행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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