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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4.03 17:59 수정 : 2013.04.03 17:59

선베드가 적치돼 있는 알래스카 페리의 갑판.

[매거진 esc] 수상한 북극

지난주 에 ‘300만원에 떠나는 알래스카 크루즈’가 나온 걸 보고 참을 수 없이 말하고 싶어졌다. ‘럭셔리’ 크루즈는 300만원이겠지만, 거짓말 좀 보태 30만원에 다녀오는 ‘헝그리’ 크루즈도 있다고. 럭셔리 크루즈라고 꽃 뿌려진 특수 뱃길 다니겠나. 그 바다가 그 바다다. 미국 시애틀에서 알래스카 스캐그웨이까지 크루즈가 다니는 바로 그 노선을 알래스카 머린 하이웨이도 다닌다. 점점이 흩어진 마을들을 연결하는 일종의 공영 완행 페리다. 뱃삯은 크루즈의 10분의 1. 지금 막 다시 찾아봤는데, 알래스카 크루즈에서도 하이라이트인 케치캔에서 주노까지 1박2일 노선이 13만원. 거기에 10만원을 더 내면 화장실 딸린 개별 객실도 준다. 대중교통의 공공성 확보를 위해 나라에서 세금을 퍼부어가며 유지하는 게 아니고서야 나올 수 없는 착한 가격이다.

물론 이 배를 ‘크루즈’라고 쓰면 대형 크루즈 선사 승무원들이 ‘아무 데나 크루즈 붙이시면 곤란하다’고 조용히 분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알래스카 머린 하이웨이에는 소는 안 타지 않나. 칠레에 가면 나비마그라고, 배낭여행자들이 나름대로 ‘크루즈’라고 부르는 페리가 있는데, 배낭여행자와 라마와 알파카가 사이좋게 타고 간다고 들었다.

그리고 뭐, 럭셔리 크루즈라고 금으로 만든 것도 아니고, 헝그리 크루즈에도 있을 건 다 있었다. 등이 파인 드레스를 입고 먹어야 하는 고급 레스토랑은 없어도 하루 3끼 꼬박꼬박 나오는 카페테리아도 있었고, 수영장은 없어도 플라스틱 선베드는 있었다. 유리창에 노란색 셀로판지를 붙여서 따뜻한 느낌이 나도록 만든 휴게실도 있었다. 물량의 열세 속에서도 어떻게든 럭셔리 크루즈의 온실형 휴게실을 따라해 보려는 갸륵한 노력으로 보였다. 볼룸댄스 강의나 선상 댄스파티는 없었지만, 승무원들이 자동차 주차 데크에 이동식 골대를 걸쳐놓고 뛰는 승무원배 농구대회는 관람할 수 있었다.

물론 이 배의 공식적인 항해 목적이 ‘크루즈 관광’이 아니긴 했다. 럭셔리 크루즈는 아침 일찍 기항지에 도착해 하루를 보내고, 밤새 다음 목적지로 이동한다. 말 그대로 움직이는 호텔이다. 우리의 크루즈는 안타깝게도 24시간 운행하는 완행버스에 가까웠다. 배는 모두가 잠든 새벽 4시에 은밀히 터미널로 우리를 데리러 왔다. 럭셔리 크루즈는 선장이 꽃목걸이를 걸어 준다던데, 우리의 크루즈 직원은 이리 오라며 형광 막대를 흔들고 있었다.

헝그리 크루즈도 럭셔리 크루즈가 들르는 모든 마을에 기항했지만, 부둣가엔 언제나 화살표만 보였다. ‘박물관, 교회, 원주민 마을, 여행자 센터, 식당 모두 왼쪽으로 하염없이’. 럭셔리 크루즈는 마을 한가운데 기항하지만, 헝그리 크루즈는 마을 외곽 화물부두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걔들은 여의도에, 우리는 암사 터미널에 내려주는 것이었다. 우리는 저 멀리 어딘가 존재한다는 마을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다, 시계를 보고 배로 돌아보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알래스카 남동 해안의 작은 마을들에서 내가 본 것은 아스팔트와, 약간의 꽃과 풀, 그리고 언덕 너머 문명 세계가 있을 거란 희망이었다. 그리고 엄청나게 많은 빙하와 뾰족한 침엽수림의 섬도. 크루즈 선전 문구에 나오는 ‘거대한 빙하와 자연’은 럭셔리건 헝그리건 그 뱃길을 지나는 모두에게 평등하니까.

최명애 <북극 여행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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