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7.24 19:43
수정 : 2013.07.25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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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에스키모 파카를 입고 방긋 웃는 에스키모 소녀. 최명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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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수상한 북극
며칠 전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는데, ‘범인이 입은 에스키모 점퍼’가 범죄를 밝히는 결정적 단서가 됐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에스키모 점퍼-모자에 털 달린 두꺼운 겨울 파카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런 겨울 파카를 에스키모 점퍼라고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파카’(Parka)가 실제로 에스키모 전통 겨울 외투를 가리키는 말이긴 하다. 모자에 털도 달렸다. ‘파키’라고도 부른다.
물론 그렇다고 에스키모들이 지금도 날이면 날마다 ‘파카’를 입고 다니는 것은 아니다. 글쎄, 모르겠다. 그린란드 북쪽 끝 시오라팔루크의 이누이트들은 평소에도 파카를 입고 다니는지도. 적어도 내가 본 알래스카 북쪽의 에스키모들은 그렇지 않았다. ‘현지 에스키모 패션’은 청바지에 운동화, 시커먼 오리털 점퍼였다. 뒤져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아마도 중국산이겠지. 세상이 현기증 나도록 바뀌고 있는데 에스키모 마을만 예외일 수도, 예외일 리도 없다. 그나마도 몇 년이 지났으니 요즘 가면 다들 유니클로 히트텍에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다닐지도 모르겠다.
이누피아트 에스키모가 사는 포인트호프에서 전통 에스키모 파카를 입고 방긋 웃는 소녀의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할머니가 만들어준 진짜 ‘파카’다. 카리부(순록)의 가죽을 무두질하고, 모자에는 울버린의 털을 달았다.(참고로, 울버린은 ‘엑스맨’이 아니라 곰처럼 생긴 큼직한 족제비다.) 그러나 이제 와 새삼 고백하자면, 이 사진 한 장을 찍기 위해 소녀를 꼬시고 달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아이는 스폰지밥이 그려진 반팔 티셔츠에 구멍이 숭숭 뚫린 크록스 차림이었다. 에스키모 옷이 그렇게 구경하고 싶다면 내가 특별히 한번 입어준다는 자세로 방 안에서 파카를 꺼내 왔다. 나와 일본인 여행자가 엄숙하게 에스키모의 지혜를 칭송하는 비디오를 보는 동안, 에스키모 어린이들은 방 안을 뒹굴며 닌텐도를 갖고 놀았다.
그래도 번듯한 에스키모 파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동네는 부자 마을이었다. 가난한 아랫마을 사람들은 그냥 중국산 오리털 점퍼에 야구모자 차림이었다. 에스키모들은 카리부 가죽으로 만든 부츠 머클럭을 신는다는데, 이 동네 사람들은 다들 고무장화를 신고 다녔다. 지구 온난화로 영구동토층의 표층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면서 동네 곳곳에 웅덩이가 생겨서다. 모르긴 해도 그 동네 머클럭을 다 합친 것보다 우리 동네 털부츠가 더 많지 싶다.
우리가 날마다 한복을 입지 않듯이, 에스키모들도 ‘에스키모 패션’을 날마다 입지는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우리가 외국인에게 ‘한복 입기 체험’을 선물하듯, 나도 그 동네 에스키모에게서 에스키모 전통 옷을 선물받았다. 큼지막한 모자가 달린 튜닉 스타일의 어린이 원피스다. 내가 놓고 간 ‘안동 탈’ 장식품을 보고, 마을 사무실의 에스키모 아저씨 코즈국이 공항까지 쫓아와 건네주고 갔다. “엄마가 만든 어린이 옷인데, 나는 아무래도 애가 안 생길 것 같아서.” 그는 “나중에 딸 낳으면 옷 입혀서 사진 찍어서 꼭 한 장 보내줘”라며 손을 흔들었다. 내가 딸아이에게 에스키모 원피스를 입혀 사진 찍어 보내줄 때까지 코즈국의 섬이 무사히 남아 있어야 할 텐데. 그가 사는 곳은 기후변화로 땅이 야금야금 깎여 들어가고 있는 알래스카 시슈마레프 마을이다.
최명애 <북극 여행자>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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