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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2.04 20:15 수정 : 2013.12.05 15:50

광고 화면 갈무리

[매거진 esc] 성분표 읽어주는 여자

패션 잡지를 넘기다가 이상한 표현이 눈에 들어왔다. “투영하고 광채 나는 피부를 선사합니다.” 투영한? 이런, ‘투명한’을 잘못 썼군. 광고 카피에 이런 오타를 내다니 세계적인 브랜드답지 않은데? 여자들 사이에 워낙 대단하게 인식되는 브랜드라 필자는 살짝 비웃어주고 넘어갔다.

그런데 같은 오타가 계속 발견되었다. “몰랐어요! 이런 게 맑고 투영한 피부란 걸”, “맑고 투영한 피부의 기적”. 최근에는 이 오타가 티브이 광고에까지 등장했다. “크리스털처럼 맑고 투영한 피부를 선물하고 싶어요.” 귀를 의심했지만 진짜였다. 이 브랜드의 광고 모델을 몇년째 하고 있는 여배우가 ‘투명한’이 아니라 정말 ‘투영한’이라고 발음한 것이다.

이쯤 되면 이것이 오타가 아니라 의도적인 설정이라는 걸 인정해야겠다. ‘맑고 투명한’이라는 표현은 진부하니 자신들만의 창의적인 표현을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창의성을 발휘하는 과정에서 문법 따위는 무시되었다. ‘투영’은 동사로만 활용되기 때문에 형용사로 사용할 수 없다. 또한 문맥으로 볼 때 ‘피부가 투영하다’고 주장하는 것 같은데 뜻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즉, 투영은 타동사라서 목적어가 없이는 문장이 완성되지 않는다.

그냥 광고일 뿐인데 뭐 어떠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광고는 늘 조합하고 합성하여 신조어를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워낙 은밀하게 뒤바꿔 놓아서 소비자들은 이것이 억지로 만든 단어라는 걸 인식하지 못한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투영한’이라는 표현을 ‘투명한’의 뜻으로 무의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게다가 이제 몇몇 일간지의 기자들까지도 이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특히 이 기업의 제품과 관련된 기사를 쓸 때에는 ‘투명’을 놔두고 굳이 ‘투영’이라고 쓴다. 기업의 홍보를 돕기 위해서라면 국어 단어 하나 망치는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말이 나온 김에 이 기업의 그 ‘투영한’ 제품들의 성분을 알려줘야겠다. 그야말로 ‘특허 받은 비밀 성분’의 집합체이지만 그 실체는 그리 특별할 것이 없다. 이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피테라’는 효모의 한 종류로 다른 여러 종류의 효모와 마찬가지로 항산화 및 항염 효과를 지니긴 하지만 광고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기적적으로 노화를 억제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품을 바른 소비자들은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한다. 피부에 윤기가 흐르고 광이 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좋은 보습성분 덕택일 수도 있지만 일부 제품의 경우에는 실리카, 티타늄디옥사이드, 산화철의 효과일 수도 있다. 이것은 화사한 커버력과 빛을 내는 성분으로 소비자들은 설마 기초 제품에 이런 성분이 들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것을 ‘화장 효과’가 아니라 제품의 효능으로 받아들인다.

물론 니아신아마이드, 판테놀, 레시틴, 토코페롤 등 다른 좋은 성분도 들어 있지만 이것들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성분으로 이 기업만의 ‘투영한’ 피부의 비밀이 될 수 없다. 어쩌면 여자들이 이 기업의 제품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비싼 가격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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