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2.25 20:12
수정 : 2013.12.26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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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최지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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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성분표 읽어주는 여자
무심코 TV 앞을 지나가다가 홈쇼핑 채널 쇼핑호스트의 말에 멈춰 섰다. “보습력이 168시간 지속됩니다. 무려 7일입니다, 여러분. 믿어지십니까?”
아니, 믿을 수가 없다. 한번 바르면 7일 동안 보습력이 유지된다고? 그 어마어마한 보습력에 압도당하기 전에, 먼저 웃음부터 나온다. 아니, 7일의 보습력이 왜 필요하지?
우리는 보통 아침 저녁으로 세안을 한다. 아침 7시에 일어나서 밤 12시에 들어온다고 가정해도 보습력은 17시간이면 충분하다. 하룻밤 안 씻고 그냥 잔다 해도 24시간 보습력이면 끄떡없다. 그런데 168시간? 이것이 20명에게 시험을 해 얻은 결과라는데, 그럼 그 20명의 여인네들은 7일 동안 씻지 않고 살았다는 뜻이 된다. 보습력은 둘째 치고 7일 동안 피부 위에 쌓였을 각질과 노폐물을 생각하니 속이 불편해진다.
또 한가지 의문은 ‘이게 가능해?’이다. 1년 전만 해도 화장품 광고들은 보통 ‘24시간 수분 팡팡!’ ‘48시간 짱짱한 보습력!’ 등의 표현을 썼다. 그런데 지금은 ‘3박4일 보습력!’ ‘96시간 파워 보습!’ ‘120시간 극강 보습’ 등의 표현이 판을 친다. 그때나 지금이나 성분은 비슷한데 어떻게 보습력만 이렇게 치솟을 수 있을까?
화장품 회사들이 내놓는 ‘시험 결과’라는 것이 이처럼 고무줄이다. 연구소가 직접 진행한 연구라지만 결국 화장품 회사의 의뢰 아래 입맛대로 짜 맞춘 실험이기 때문이다. 168시간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얻어내기 위해 이들은 보습력의 범위를 임의로 설정했다. 즉, 바르고 최고의 보습력이 유지되는 시간이 168시간이 아니라 최고에서부터 맨 얼굴에 가까운 보습력으로 떨어지기까지의 시간이 168시간인 것이다.
게다가 보습력을 측정한 단위도 연구소의 시험자가 마음대로 설정한 ‘임의의 단위’이다. 이것은 여러 제품의 성능을 비교할 때 쓰이는 상대적 단위이지 제품 단 한개의 성능을 보여주는 절대적 단위가 아니다. 즉, 바르면 6000 이상 치솟는다는 이 보습력이 실제 피부 수분도로 얼마를 의미하는지는 시험자 외에 아무도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업체는 이 데이터를 내밀며 ‘대한민국 최초 168시간 보습 유지’라고 광고한다. 자기들이 만든 기준으로 얼렁뚱땅 실험해놓고 마치 권위 있는 공식 기관에서 보습력을 인증받은 것처럼 과장하고 있다. 만약 시중에 나온 보습제품들을 똑같은 방식으로 실험한다면 거의 대부분 3박4일, 5박6일 보습력이 유지된다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최근 몇년 사이 화장품 광고의 표현 수위가 더욱 자극적으로 변하는 걸 느낀다. 화장품에 ‘마녀크림’ ‘악마크림’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물광’ ‘물벽’ ‘수정광채’ ‘볼륨필러’ 등의 신조어가 휘감긴다. ‘보습력 168시간’이라는 이 어마어마한 수치도 이런 추세와 궤도를 같이한다. 그 부작용은 우리의 사고가 마비된다는 것이다. 마치 설탕에 중독되어 음식 맛을 모르게 되는 것처럼, 혹은 포르노에 중독되어 진짜 섹스에 흥미를 잃는 것처럼 화장품에 대한 표현이 자극적일수록 성분과 효과에 대한 합리적 의문을 품고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이 퇴화한다. 그저 더 세고 자극적인 표현을 접할 때마다 ‘총 맞은 것처럼’ 사고 또 사고를 반복하는 ‘호모 콘수무스’(homo consumus·소비하는 인간)가 있을 뿐이다.
최지현 화장품 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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