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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3.25 11:14 수정 : 2013.08.07 14:30

최진영 소설 ⓒ전지은

최진영 소설 [1화]

조리법

냉동실을 열고 비닐 팩에 넣어둔 책을 꺼낸다. 책이 살짝 녹기를 기다린다. 물이 끓는 동안 책장을 넘기며 아무 문장이나 읽는다. 마음에 상처를 내거나 뒤통수를 때리는 문장을 발견하는 즉시 그 장을 찢는다. 한 장도 좋고 세 장도 좋고 다섯 장도 좋지만, 그 이상은 곤란하다. 찢어낸 낱장을 면발처럼 기다랗게 다시 찢는다. 가위를 사용하여 꼴뚜기나 전복, 가재 모양으로 오릴 수도 있다. 끓는 물에 스프와 라면, 찢거나 오린 책장을 몽땅 넣는다. 젓가락으로 저어준다. 마음의 여유가 있다면 달걀이나 파, 콩나물을 넣어도 좋지만, 그런 여유가 있는데 굳이 종이를 먹을 이유는 없으니 패스. 이제 됐다 싶을 때 불을 끈다.

평범하게 먹는다. 먹으며, 먹고 있는 문장과 아름다운 그녀,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 그리고 지난날에 대해 생각한다. 생각에 침을 섞어 꼭꼭 씹는다. 씹으며 약분한다. 함께였던 지난날과 함께라는 가정 아래 상상했던 미래의 약분. 반드시 국물까지 다 먹는다. 설거지를 한다. 물 묻은 손을 대충 닦으며 돌아보면, 짧은 시곗바늘이 손가락 한 마디가량 이동해 있다. 움직인 시곗바늘만큼 나도 그 시간을 살았나? 따위 질문은 접어둬도 좋다. 뭐라도 했고 뭐라도 먹고 뭐라도 소모했다. 그럼 됐다. 그 정도면 된다.

이 책을 읽어

지난여름, 노마에게 전화를 걸어 그날 있었던 일을 말했다.

확실해?

노마가 물었다.

무슨 뜻이야?

내가 되물었다.

얼마 후에 다시 만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뭐 그런 뜻.

나는 앞니로 마른 입술을 잡아 뜯으며 웅얼거렸다.

모르겠어.

나무껍질 같은 살점을 자근자근 씹으며 덧붙였다.

그럴 수 없을 거야. 아마.

알 수 없지.

노마가 대꾸했는데, 위로하자고 하는 말은 아니었다. 노마는 내게 위로가 아닌 인식을 준다. 아파도 섣부르지 않은 노마의 말은 혹한의 밤하늘처럼 선명하다. 그리고 생활은 다소 흐리멍덩하다. 때문에 나는 노마를 신뢰한다. 쉬운 건 말뿐임을 노마는 정말 잘 아니까.

여덟 시쯤 들를게.

말하며 노마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자정 넘어서 왔다. 노마는 늘 늦지만, 늦는다는 걸 알면서도 노마가 말한 시간부터 기다리게 된다. 두유 한 상자와 비타민 음료 한 상자를 양손에 들고 방에 들어선 노마는 음료수병을 하나하나 꺼내 방구석에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이건 뚜껑 열고 그냥 마시면 돼. 알지?

개학 전날 방학 숙제처럼 나란히 늘어서 있는 병을 멍청히 쳐다보고 있는 내게 노마가 두유를 건넸다. 건네며 명령했다. 마셔. 군소리 없이 꿀꺽꿀꺽 넘겼다. 달콤했다. 달콤한 그것이 속을 채우는 속도로 미지근한 눈물이 차올랐다.

이별이야 간단했다. J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됐고, 그것을 알게 된 내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커피가 나오는 것처럼, 이별은 단 몇 초 만에 척척 이루어졌다. 간단명료한 그 과정을 두서없이 말하며 나는 꺽 트림을 했다. 달콤했던 두유가 비리고 시큼한 액체로 변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이야기를 다 들은 후, 노마는 내게 세 가지를 요구했다.

첫째, 상황을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망가뜨릴 것.

둘째, 모두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그들의 말을 일단 들을 것.

셋째, 이 책을 읽어.

노마가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유명한 외국 여배우의 전기(傳記)였다. 책 표지에는 그녀의 얼굴이 큼직하게 실려 있었다. 어렴풋하고도 슬픈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는 즉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이목구비와 얼굴선, 펜슬로 그린 게 분명한 눈썹까지, 모두 완벽했다. 완벽한 균형과 대칭이었다.

왜 하필 이 책이야?

두껍잖아.

두껍긴 했다. 600페이지가 넘었다.

차라리 해리포터를 읽으라고 하지 왜.

그건 다 뻥이잖아. 이 책의 절반 이상은 틀림없이 있었던 일이고, 나머지는 있었던 일의 해석인데, 지금 우리에겐 그게 필요해. 절반의 사실과 절반의 해석.

‘우리’라는 말이 마음에 철썩 들러붙었다. 노마는 가방에서 시루떡과 백설기 두 팩을 꺼내 책 위에 올려두고 무심히 떠났다. 떡은 먹기 좋은 크기로 조각조각 썰려 있었다. 노마가 떠나고 홀로 남자, 떡도 책도 노마도 나를 버린 그 인간도 다 싫어졌다. 떡과 책을 냉동실에 처넣으며 나는 재채기하듯 잠깐 울었다.




최진영(소설가)




최진영

2006년〈실천문학〉에 단편소설〈팽이〉로 등단했다. 제15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 《끝나지 않는 노래》,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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