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영 소설 [2화]
냉동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나흘을 보냈다. 닷새째 되는 날, 노마가 두고 간 두유 뚜껑을 간신히 땄다. 허겁지겁 두유를 들이켜자마자 구역질이 났다. 방바닥에 토했다. 토하고, 다시 마셨다. 겁내면서 천천히 넘겼다. 비틀비틀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었다. 생수와 수분 크림과 유통기한 지난 유자차와 오메가와 냄새 먹는 하마와 곰팡이 핀 식빵과 껍질을 깨면 삐악삐악 병아리가 튀어나올 만큼 오래된 달걀 삼총사가 있었다. 냉동실 문을 열었다. 노마가 두고 간 떡과 책이 보였다. 떡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넣고 버튼을 눌렀다. 떡이 녹는 동안, 꽝꽝 얼어버린 책을 멀거니 쳐다봤다. 아름다운 그녀는 빙하 타고 내려온 둘리처럼 그 모습 그대로 얼어 있었다. 땡! 소리가 나자마자 전자레인지를 열고 떡을 입에 집어넣었다. 넣었다가 뱉어냈다. 태양이라도 문 것 같았다. 입안이 통째로 쓰라렸다. 떡이 적당히 식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J와 만난 삼 년보다 길게 느껴졌다. 뜨거운 것은 결국 식는다. 그게 자연이다. 이별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얼었다가 녹았다가 뜨거워진 떡이 다시 식는 동안, 책도 조금씩 녹았다. 따뜻한 떡을 씹으며 책을 펼쳤다.
떡은 놀랍도록 맛있었고, 책 속의 그녀는 놀랄 만큼 비슷했다. 어린 날의 노마와.
아름답다
어릴 때 우리 가족은 거의 일 년에 한 번꼴로 이사를 했다. 세 번째 학교를 떠나며, 나는 친구 사귀기를 포기해버렸다. 낯설긴 한데 낯선 것이 더는 낯설지 않은 다섯 번째 학교는 벚나무 천지였다. 전학 첫날, 시소와 뺑뺑이와 그네와 세종대왕 동상에 수북이 쌓여 있는 흰 꽃잎을 보자 어쩐지 울적해졌다. 흰 꽃 다시 피기 전에 떠날지도 모르는데, 전학은 해서 무엇하며 최대공약수는 배워 어디에 쓰나 싶었다.
선생님을 따라 들어간 교실에서 부질없는 자기소개를 하려는데, 이 분단 오른쪽 넷째 줄에 앉아 있는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나는 그만 내 이름을 까먹어버렸다. 자기 이름을 까먹는 게 말이 되느냐고? 그 시절의 노마에겐 그런 초능력이 있었다. 자기를 보는 사람들의 뇌에서 ‘아름답다’를 제외한 모든 단어를 지워버리는 초능력. ‘예쁘다’가 아니다. ‘귀엽다’도 아니다. ‘아름답다’다. 노마는 열두 살 때부터 충분히 아름다웠다. 노마를 만나기 전, 내 머릿속에는 ‘아름답다’라는 글자만 있었다. 노마를 보는 순간 그 글자에 의미가 채워졌고, ‘아름답다’는 비로소 완벽해졌다.
노마에게서 간신히 눈을 떼고도 내 이름을 떠올리지 못해 끙끙댔더니 선생님이 내 소개를 대신 해주었다. 인간적으로, 선생님도 내 마음을 이해했던 거다. 노마에겐 그런 초능력도 있었다. 자기를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똑같은 색깔과 모양으로 만드는 초능력. 노마 앞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였다. 하나 된 마음으로 노마에게 빠져들었다. 선생님이 정해준 자리에 앉으며, 다시 전학을 가게 된다면 가출해버리겠다고 다짐했다. 노마 때문이었다.
아니, 안 괜찮아
책에 실린 그녀의 사진을 보자마자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페이지를 찢어 떡과 함께 씹어 먹었다. 어차피 종이고, 종이는 나무고, 어떤 나무는 식자재고, 비록 그녀는 잉크지만, 잉크라고 못 먹을 것도 없었다. 아름다운 그녀는 나의 피와 살이 될 것이었다. 내면의 아름다움이랄까, 그런 것을 갖는 기분이었다. 책에 실린 사진을 다 먹으며 사흘을 보냈다. 또 먹을 만한 것을 찾아 책을 뒤적이다가,
“마릴린? 괜찮은 거냐구?” “아니, 안 괜찮아.” 마침내 마릴린이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처럼 대답했다.*
라는 세 문장에 마음을 뺏겼다. 그렇지. ‘안 괜찮아’라는 말이 있지. 핸드폰을 찾아 집 안을 샅샅이 뒤지다가 벨 소리를 듣고 손에 쥔 핸드폰을 귀에 갖다 대며 ‘아니, 내가 지금 핸드폰을 어디에 뒀는지 모르겠어서’라고 말하는 사람처럼,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렇지. ‘안 괜찮아’라는 말은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에나 할 수 있는 말이지. 헤어지자고 했을 때, J가 물었다.
괜찮아?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괜찮다고 대답했다. 제기랄. 그때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문장을 먹고 싶었다. ‘안 괜찮아’라는 말을 절대 잊지 않도록, 피와 뼈와 근육과 살에 그 문장을 심어버리고 싶었다.
냉동실 문을 열었다. 놀랍도록 맛있는 떡은 그녀의 사진과 함께 다 먹어치운 후였다. 대신 언제 해 넣었는지 알 수 없는, 사실 짐작은 가지만 그 날짜를 떠올리기 두려운 밥 한 덩이가 있었다. 밥을 녹이며 싱크대 찬장을 샅샅이 뒤졌다. 유통기한 지난 비빔면 세 봉지와 즉석 카레와 으리으리한 화초로 변모한 감자 두 알과 죽염 한 통과 모두 모으면 바벨탑이라도 쌓을 수 있을 것 같은 플라스틱 반찬 통과 가장 작은 반찬 통 속에 비상금으로 넣어둔 오만 원과 맙소사, 이게 대체 웬 떡이람? 미니 오븐과 오븐 사용 설명서와 반쯤 남은 소주와 하도 오래되어서 잠시 배양토라고 착각한 원두 가루와 참치 통조림 세 개를 찾아냈다. 모두 그것이 거기 있는지 몰랐던, 기억에 없는 것들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집 안 어딘가에서 드래곤볼 일곱 개를, 서너 개가 아닌 일곱 개 전부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냄비에 물을 붓고 녹은 밥과 참치—아, 참치. 참치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지만 일단 싱크대 찬장에 넣어두겠다. 할 말이 바닥날 훗날을 위해—와 ‘아니, 안 괜찮아’라는 문장을 찢어 넣고 팔팔 끓였다.
참치 죽은 놀랍도록 맛없었다. 죽염을 뿌렸더니 짜고 맛없어졌다. 그래도 그 속엔 ‘아니, 안 괜찮아’라고 말하는 아름다운 그녀가 있었다. 나는 가정교육 잘 받은 어린애처럼, 짜고 맛없는 데다가 건강에 해로울지도 모를 그것을 감사한 마음으로 싹싹 긁어 먹었다.
*J. 랜디 타라보렐리 지음, 성수아 옮김, 《마릴린 먼로 THE SECRET LIFE》, 체온365, 167쪽.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