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3.03.29 11:54 수정 : 2013.04.02 10:27

최진영 소설 [5화]



너의 불행

일단 노마에게 다가갔다. 그저 다가가는 것에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해서, 겨우 다가갔을 때 나는 이미 지쳐 있었다. 지친 상태로 깨달았다. 아름다운 노마 옆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시녀 노릇뿐이란 것을. 늘 노마 옆에서 노마의 이야기를 듣고, 화내지 않고, 양보하고, 새것이나 좋은 것이 생기면 노마에게 먼저 주고, 험하고 더러운 일은 대신해주고, 노마의 편을 들고, 기꺼이 누명을 쓰고 뭐, 그런 식이었다. 그것이 내가 아는 우정이고 사랑이었다. 그렇게 친해졌다. 좋았다. 재미있었고, 멋졌다. 친구란 정말 멋진 것이었다.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가 어떤 사람인지, 내 집이 어디며, 내가 가장 아끼는 것, 싫어하는 것, 무서워하는 것, 내 말버릇, 내 글씨체 따위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하루는 달라졌다. 하도 다물고 있어 군내가 나던 입에서 단내가 나기 시작했다.



노마에게는 엄마가 많았다. 하나, 둘, 셋…… 그래, 셋 정도 있었다. 사실 셋 이상인데, 셋보다 많으면 좀 헷갈리니까 셋 다음부터는 고모나 이모였다. 노마를 낳아준 엄마가 마음의 병을 얻어 노마를 누군가에게 맡기고, 맡겼던 노마를 엄마의 친구가 다시 찾아오고, 찾아왔다가 고아원에 보내고, 다시 다른 엄마에게 맡겨지고……. 엄마 노릇을 하는, 그래서 엄마라고 불러야 하는 사람이 자꾸 바뀌었던 것이다.



때문에 노마는 언제나 대비해야 했다. 버려질 것에 대해. 버려질지도 모른다는 절박함이 노마를 더 아름답게 했는지도 모른다. 적당히 아름다운 것으로는 부족했다. 극도로 아름다워야 했다. 차마 버릴 수 없을 만큼. 절반의 외로움과 절반의 불안. 아니, 헷갈리게 나눌 것 없다. 통째로 사랑. 두려운 것도 바라는 것도 오직 사랑뿐이었다. 노마는 늘 사랑을 원했다. 보다 깊은 사랑.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만져주는 것, 만져주는 것을 넘어 잡아주는 것, 잡아주는 것을 넘어 껴안아주는 것, 껴안고 토닥이고 어쩌면, 물어뜯어 주는 것.



다들 힘들었다. 마음의 병으로 힘들고, 사정이 안 좋아서 힘들고, 자기 가정을 챙겨야 하니까 힘들고. 힘들어서, 노마까지 챙길 여력이 없었다. 그렇다고 노마를 완전히 놓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다가와 노마를 책임지려고 하면, 아니야, 이건 내 것이야!’ 소유권을 주장하며 어설프게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지금은 힘들어서 노마의 손을 꽉 쥐고 있을 수 없지만,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를 다른 이에게 뺏길 수도 없다는 식이었다. 노마는 자꾸 어정쩡한 상태에 놓였다. 그 누구의 손도 꽉 잡을 수가 없었다. 언제 어디서나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노마, 누구나 한 번쯤은 탐내는 노마, 우는 모습마저 아름다운 노마가 울먹이며,

“착한 애가 될게요.”

“제발 다른 데로 보내지 마세요.” *



라고 말했지만 결국 나는 고아원에 가야 했지 뭐야. 내겐 친엄마도 있고 양엄마도 있고 이모도 있는데 말이야. 하고 말했을 때, 나도 노마를 따라 울먹이고 싶었다. 하지만 울지 않았다. 슬프기보다 기뻤다. 드디어 비밀을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으니까. 나는 노마의 상처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니까. 노마는 이제 나를 버리고 어디로도 갈 수 없을 테니까. 간다면, 노마의 비밀을 꼭 쥐고 있는 내 손을 잘라 가야 할 테니까. 우리 사이를 가르는 깊은 계곡, 시시콜콜한 일상으로는 도무지 채울 수 없는 그 계곡을 노마가 털어놓은 비밀이 채웠다고 나는 믿었다. 채워 평평해진 그곳이 우리를 하나로 만들었다고.



물론 착각이었다. 그건 비밀이 아니었다. 모두가 노마의 상처를 알고 있었다. 내게 친구라곤 노마뿐이었고, 모두가 알고 있는 그것을 나만 모르다가 결국 나도 알게 된 것인데, 나만 몰랐다는 것까지는 몰랐던 것이다. 게다가 저마다 알고 있는 내용이 조금씩 달랐다. 마치 친한 정도에 따라 선물의 종류와 가격을 달리하듯, 노마는 아이들에게 조금씩 다른 내용의 불행과 상처를 말했다. 모두가 동의하는 사실은, 아름다운 노마가 고아원에 살아서 불행해 한다는 것뿐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노마의 불행은 과장보다 사실에 가까웠다. 화가 났다. 나를 믿지도, 좋아하지도 않아서 과장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내겐 노마뿐인데, 노마는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노마에게도 나뿐이었으면 좋겠는데, 노마는 나를 운동장의 모래알처럼, 벚나무의 꽃잎 한 장처럼 대했다. 분명 그런 것 같았다. 나는 노마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고 헌신했는데, 나의 모든 시간과 힘과 애정을 노마에게 쏟아 부었는데, 그런데도 나는 다른 아이들과 동급이거나 그 아래였다. 나만 특별하다는 어떤 표지도 찾을 수 없었다. 어떻게 내게 이럴 수가 있지?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노마의 한쪽 손을 꼭 쥔 채 생각했다. 이것만이 아니야. 이것 이상이 필요해.

*같은 책, 71쪽




한겨레출판 문학웹진한판 바로가기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최진영의 <후>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