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영 소설 [7화]
흉
좋아하는 나무가 있었다. 두 번째 학교 교정엔 플라타너스가 많았는데, 그중 가장 작고 약한 나무였다. 언제나 거기 있는 그 나무가 소중하고도 좋아서, 나무에게 이름을 붙여줬다. 정글짐 꼭대기에 올라가면 그 나무의 파란 잎을 만질 수 있었다. 정글짐 속에서 헤매고 헤매다 지치면, 꼭대기에 걸터앉아 잎의 수를 헤아리곤 했다. 헤아리다 헷갈리면 다시 정글짐 속을 헤엄치듯 헤맸다. 그러다 보면 하늘은 밤일 나갈 채비라도 하듯 알록달록 화장을 시작했고, 태양은 내 발아래로 똑 떨어졌다. 그 시간이 될 때까지 나무에게 나의 이야기를 했다. 엄마아빠가 또 싸웠어. 집에 가기 싫다. 왜 그럴까 맨날. 누가 내 실내화 훔쳐갔어. 양말이 까매졌어. 혼날까 봐 무서워. 곱셈 너무 어려워. 진짜 개떡 같아. 그거 좀 틀렸다고 나머지를 시키다니. 창피하게. 몰라서 틀린 걸 혼자 남아 푼다고 척척 풀게 되나? 웃겨 정말. 나보고 못생겼대. 그러는 지는. 나도 나무였음 좋겠다. 그럼 분수 같은 거 몰라도 될 거 아냐. 분수 알아봤자 맨날 싸우기나 하는걸 뭐. 세상 사람들 전부 분수를 모른다면 안 싸울지도 몰라. 어때 내 생각이? 어, 그게 뭐냐면 숫자 위에 선을 긋고 또 숫자를 쓰는 거야. 숫자 위에 숫자가 사는 거야. 이층집 같은 거야. 이층집에 살고 싶다. 엄마아빠 싸우는 소리도 안 들릴 만큼 아주 커다란 이층집. 글씨도 어려워. 띄어쓰기 좀 틀리면 어때서. 그런다고 세상이 망하나? 띄어쓰기 알아봤자 또 맨날 싸우기밖에 더하겠어? 다들 벙어리면 좋겠다. 벙어리에 봉사면 좋겠어.
그 학교를 떠나기 전날, 뾰족한 돌로 나무의 몸에 흉터를 만들었다. 나만 알아볼 수 있는 표시였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사라지지 않을 만큼 깊고 깊은 흉터였다.
그보다 더 어릴 때, 좋아하는 인형이 있었다. 마론 인형이었는데, 머리칼은 노랗고 몸은 미끌미끌한, 흔한 인형이었다. 언제나 거기 있는 그 인형이 소중하고도 좋아서, 인형에게 이름을 붙여줬다. 눈 내리던 어느 날, 매직으로 인형의 노란 머리칼을 까맣게 칠했다. 그 인형은 내게 정말 특별한데, 특별한 그것이 다른 아이들이 가진 것과 똑같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머리칼만 까맣게 만들려고 했는데, 매끈한 얼굴과 몸도 거뭇거뭇해졌다. 그래서 못생기고 더러워졌지만, 그 얼룩이 인형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내 것이라는 표시가 되었다.
그렇다. 나는, 상처를 내고 흉터를 만들어 나에게만 특별한 무엇을 구별하곤 했다. 본디 그런 애였다.
노마는 인형보다 예쁘고 나무보다 생기로웠다. 그리고 인형이나 나무보다 인기가 많았다. 겉모습에 아무리 흉을 내봤자 티도 안 나고 금방 낫고, 아니, 흉 때문에 더 관심받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노마의 가치에 흉을 냈다. 노마를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꾸몄다. 그리고 퍼뜨렸다. 노마가 누구누구 욕을 하고 다닌다. 노마가 누구누구 물건을 훔친다. 노마가 이러저러한 거짓말을 한다. 노마가 남자애랑 이러저러한 짓을 했다. 노마가 선생님들 앞에서 이러저러한 척을 했다. 내가 뱉어낸 짧은 말은 여러 아이의 입을 거치며 한여름 나뭇잎처럼 무성해졌고, 조회 시간에 모인 아이들의 옷 색깔처럼 휘황찬란해졌다. 모두 거짓말만은 아니었다. 절반의 사실과 절반의 해석이었다. 그것에 상상 한 방울이 떨어지는 순간, 이야기는 우주처럼 팽창했다.
노마의 말과 행동을 해석하고, 그 너머를 상상하고, 상상을 이야기로 만들고, 만들어진 이야기를 친구들과 나누면서 나는 사람과 친해지는 방법을 새로 배웠다. 아이들은 내 주변으로 모여들었고, 내 이야기를 듣고 내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노마가 친구를 잃는 속도로 나는 친구를 얻었다. 주변에 사람이 많아지자 이전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자신감이 생겼다. 도깨비 같은 자신감이었다. 내가 노마를 졸졸졸 따라다녔듯, 이젠 노마가 나를 따라다녀야 한다는 자신감. 시냇물처럼 졸졸졸 따라오지 않는다면 훨씬 더 지저분한 소문을 만들어 네 눈물까지 다 마르게 하겠다는, 꺼이꺼이 우는 시늉만 내다가 산산이 흩어지는 모래 먼지로 만들 수도 있다는 자신감. 그러니 너는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 그렇게 생각하고 생각대로 행동하자, 홀린 사람처럼, 노마도 내 생각대로 움직였다.
나는 여전히 노마를 아끼고 사랑하고,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 다루듯 했다. 노마가 슬퍼하면 함께 슬퍼하고, 노마의 농담에 웃고, 노마의 거짓말에 귀 기울이고, 노마의 한탄에 맞장구치고, 좋은 것이 생기면 노마에게 먼저 주었다. 동시에 지배하려고 했다. 물건처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손에 쥐고 온종일 조몰락거렸다. 나는 되도록 노마 옆을 떠나지 않았고, 그래서 노마는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하는 대신 ‘착한 애가 될게요’라는 눈빛으로 나를 봤다.
벚나무 잎이 다양한 색으로 물들어가던 가을날. 운동장에서 피구를 하다가 깨달았다. 노마 옆에는 나뿐이었다. 노마는 말도 글씨도 모르는 어린애가 엄마한테 그러듯,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내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내가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불안해하고 신경질을 냈다.
“내 꿈은 내 자신이 굉장히 아름다워져서 내가 지나갈 때 사람들이 날 보기 위해 돌아보는 거였어요.”* 라는 문장에 된장을 잔뜩 묻혀 꼭꼭 씹으며 생각했다. 노마. 널 착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모두가 널 괴물로 만들 거야. 착할 필요 없어. 아름다우면 돼. 그것만으로 충분해.
*같은 책, 7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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