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영 소설 | 후] 8회

최진영 소설 [8화]

하나도 안 변했구나, 너

노마를 독차지한 채 실컷 바라보고 만지고 껴안고 토닥이고 상처 내다가, 나는 여섯 번째 학교로 떠났다. 노마를 떠난 후 한동안 다시 친구를 사귈 수 없었다. 노마 아닌 모든 사람이 시시했다. 너무 시시해서 화가 날 지경이었다. 한편으로 무서웠다. 내 안의 괴물을 얼핏 본 후였다. 그 자식이 튀어나와 또 무슨 짓거리를 할지 알 수 없었다. 사람을 좋아하고 알고 사귀고 친해지는 것 자체가 겁났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내가 무서웠다. 누군가에게 반하는 순간, 누군가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 순간, 그 웃음에 도무지 무심할 수 없을 때, 앵앵거리던 괴물은 때를 놓치지 않고 큰 소리로 울며 횡포를 부렸다. 괴물의 횡포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내가 사랑에 빠졌다는 신호였다. 그때마다 노마를 기억했다. 그녀의 아름다움과 그 너머를 떠올렸다. 괴로웠다.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또한 만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떠난 후 노마는 어떤 시간을 보내야 했을까. 노마를 알기 전의 나처럼 혼자 정글짐 속에서 헤매야만 했을까. 헤매다가 벚나무의 푸른 잎을 만지며, 나비도 태양도 사람도 모르고 나무만 아는 땅속 이야기를 상상해야 했을까.

서른이 넘어 노마를 만났다. 노마를 보는 순간, 오랜만에 설레었다.설레면서 겁났다. 겁나서 슬펐다. 괴물이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나를 보자마자 노마는 말했다. 하나도 안 변했구나, 너. 어른이 된 서로에게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을 때, 노마는 다시 말했다. 정말 하나도 안 변했구나, 너. 노마 역시 그대로였다. 여전히 아름답고, 사랑하며, 단 한 사람의 사랑이 아닌 모두의 사랑을 원했다.

어릴 때는 ‘잘못했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게 두려워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어른이 되어서는 ‘미안해’라는 말, 해봤자 아무 소용없을 때가 많아서 거짓말을 한다. 잘못했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힘들 때면 노마를 찾았다. 노마와 즐거움을 나누고 싶진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그 정도의 염치는 있었다. 그녀 앞에서 나는 충분히 불행한 사람이어야 했다. 그래서 연기를 했다. 조금 더 불행한 척. 조금 더 괴로운 척. 더 미련한 척. 더는 그녀를 부러워하지 않는 척. 탐내지 않는 척. 그리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