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3.04.04 11:16 수정 : 2013.04.05 09:53

최진영 소설 [9화]



일 년 후

J는 나의 네 번째 애인이었고, 앞선 세 번의 이별도 아프긴 마찬가지였다. 물난리가 나면 금은보화와 쓰레기가 동시에 떠내려가듯, 이별 후 모든 것이 빠져나간 그 자리는 더없이 황폐했다. 황폐한 그 자리를 돌돌 싸매 ‘괜찮다’, ‘미안하다’, ‘고맙다’ 따위의 말로 꿰맸다. 촘촘히 박음질했다. 그런 허튼 말로 박음질한 마음이 제대로 봉인될 리 없는데, 듬성듬성 기운 마음으로 또다시 사랑에 빠지곤 했다. 그러니 비슷한 실수와 후회를 반복할 수밖에. 얼기설기 꿰맨 마음은 사소한 오해와 갈등에도 지저분하게 터졌다. 터진 마음을 멍청히 내려다보며, 대체 언제 터진 건지, 왜 터진 건지, 이미 부패하기 시작한 과거의 흔적을 황급히 뒤적이다 고개를 들면, 어느새 이별 후였다. 이별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자연스러운 그것은 내 선택과 상관없이 절로 그리될 것이니까.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마음먹는다고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에는 ‘사랑’보다 더 어울리는 이름이 따로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사랑이나 이별이 아니라, 그 사이의 시간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 뿐이다.

J와 헤어지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친구들 사이를 돌고 돌던 말이 다시 내 귀에 들어왔다. 친구들이 말하는 나의 사랑과 이별은 내가 알고 겪은 것과 미세하게 달랐다. 하지만 오해를 풀고 싶지도, 오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오해라면, 내가 알고 내가 기억하는 것 역시 오해일 테니까. 나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포기했다.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진의를 왜곡했듯, 이별을 감당하는 데도 왜곡은 필요했다. 한동안 그런 시간을 보냈다. 듣고 싶은 대로 듣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했다. 그런 시간마저 지나고 나자, 내가 겪은 일들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졌다.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 평범하거나 특별해지는 것이 만남과 이별이라면, 내게 필요한 것은 특별함이 아닌 평범함이었다. 필연이 아닌 우연, 영원이 아닌 찰나, 과거가 아닌 현재, 상상이 아닌 사실이었다. 상상과 해석을 걷어내자 지난 삼 년은 ‘J와 내가 만나서 J와 내가 헤어졌다’는 한 문장으로 그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뿐이었다. 그뿐인 이야기에 삼 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마릴린과 조 디마지오의 사랑, 마릴린과 아서 밀러, 마릴린과 JFK의 하룻밤, 마릴린의 마지막 밤과 FBI. 이야깃거리는 많다. 단 한 방울의 상상 혹은 오해만 떨어뜨리면 평생을 이야기하고도 남을 만큼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영화배우이자 가수인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본명:노마 진 모텐슨Norma Jean Mortensen)는 1926년 6월 1일에 태어나 1962년 8월 5일에 죽었다.’

선택해야 한다. 허구를 제거할 것인가, 더 많이 상상할 것인가. 지구가 태양 한 바퀴를 완주한 후에야, 나는 상상이 아닌 사실을 선택할 수 있었다. 과거는 그대로 두고, 일단 두고, 현재를 살고 싶었다. 허구와 상상을 제거한 J는 너무나도 무미건조했다. 시시했다. 매력적이지도 흥미롭지도 궁금하지도, 그립지도 않았다. 무감동하고 무감정하고 무감각했다. 그래서 슬펐다.




한겨레출판 문학웹진한판 바로가기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최진영의 <후>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