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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4.05 09:47 수정 : 2013.04.08 11:38

최진영 소설 [10화]



한 문장

노마 이후, 나는 노마를 사랑하듯 다른 이를 사랑했다. 사랑하는 이를 흉보고 상처 내면서 내 사랑을 과시하곤 했다. 그러므로 친구가 말한, 여집합 없는 사랑을 하는 이는 J가 아닌 나인지도 모른다.

몰랐던 건 아니야.

노마가 말했다. 여전히 미안하다는 말도 잘못했다는 말도 없이, 노마에게 흉을 냈던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낸 후였다.

미웠지. 미웠는데, 죽도록 미워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너도 내가 미워서 그랬나 보다. 미운 거랑 싫은 거랑은 다르잖아. 좀 달라. 그렇지? 나는 네가 나를 미워했다는 것도 알고, 그보다 먼저 나를 엄청 좋아했다는 것도 알고, 소문을 퍼뜨리던 순간에도 나를 좋아했다는 것도 알아. 근데 좋아하면서도 미워하는 게, 아예 무관심한 것보다는 나아. 안 그래? 무슨 말인지 알 거야. 넌 무관심해지길 바라잖아. 그 사람이 지금 뭘 하는지, 밥은 잘 먹는지, 별일 없는지, 아프지는 않은지, 네 생각은 하는지, 그런 모든 생각에 대해. 그래야 편해질 테니까. 그렇지?

아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그런 생각 하지 않았어.

정말이다. 이별 후 나는 J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걱정하지 않았다. 깨달음은 항상 뒤늦다. 뒤늦어서 소용없는 것은 아니지만, 깨달은 대로 살 수 없는 경우도 있기에, 뒤늦게라도 깨닫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이십여 년 전 노마와 헤어지고, 이후에 사랑했던 사람들과 번번이 헤어지고, 다시 노마를 만나고, 다른 사랑에 빠지고, 결국 다시 헤어지면서도 깨닫지 못했던 것이 있다.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이 있다. 미안하다거나 잘못했다는 말만큼 하기 힘든 말이다. 두려운 말이다.

누구를 사랑하든 누구와 헤어지든, 난 널 생각했어.

J와 나의 연애를 약분하고 약분하여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 결국 이 문장이 남았다. 나는 문장을 소리 내어 말하는 대신, 얄팍해진 마릴린 먼로의 생애와 함께 냉동실에 넣었다. 언젠가 노마를 덜 겁낼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그런 날이 오는 것도 오지 않는 것도 두렵지만 기어이 온다면, 이 문장을 녹여 노마에게 아주 맛있는 요리를 해줄 것이다. 이 순간의 설렘과 두려움은 있는 그대로 노마의 몸속으로 들어가 노마가 될 것이다. 내 진심은 그렇게 전해질 것이다.




(이상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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