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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미 소설 <고귀한 혈통> ⓒ전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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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미 소설 <1화>
패리스 싱어(Paris Singer)는 1864년에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인 이사벨라 우제니 보이어는 몰락한 귀족 집안의 딸이었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 이미 그녀의 집안은 몰락할 대로 몰락한 상태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파리 뒷골목의 선술집을 운영해서 가족들을 겨우 먹여 살렸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혈통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특히 외동딸이었던 그녀에게 몰락했을지언정 귀족의 여인인 만큼 정숙한 숙녀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잔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가끔 어린 그녀를 자신의 술집에 데리고 갔다. 거기에는 가슴을 훤히 내놓고 웃고 떠들며 춤추는 여자들이 있었다. 여자들은 앞니가 하나씩 없었다. 그녀는 무서웠다. 가끔 그녀는 이가 모조리 다 빠진 여자들이 나오는 무서운 꿈을 꾸었다. 그녀는 열일곱 살부터 일 년 동안, 그러니까 그의 아버지가 도저히 수녀원 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되어서 그녀를 불러들일 때까지 남부 지방의 수녀원에서 교육을 받은 경험이 있었다. 패리스 싱어의 아버지인 아이작 싱어는 그 당시 사업차 파리에 들른 미국의 억만장자였다. 그들은 나이 차이가 무려 서른 살이나 났다. 그녀가 스물한 살이었으니까 아이작 싱어는 이미 오십 대였다. 아이작 싱어는 두 번째 이혼 소송 중이었고 그 두 번의 결혼 생활에서 이미 여섯 명의 자식을 두었다. 그리고 각각 다른 상대와 하룻밤을 보내면서 거의 스무 명에 가까운 자식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사벨라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사랑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집을 나와 그가 머물던 호텔로 들어가 살림을 차렸다. 그녀의 아버지는 화가 나서 그녀에게 다시는 돌아올 생각도 하지 말라고 했다. 속수무책이었다, 고 그녀는 나중에 말했다. 그녀가 임신을 했을 때에야 아이작 싱어는 자신의 복잡한 여자관계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녀는 영어를 잘 알아듣지 못해서 몇 번이나 되물어야만 했다. 아이작은 어느 날 말도 없이 파리를 떠나버렸다. 혼자 남겨진 그녀는 도움을 청할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어렸을 적에 보았던 그 이 빠진 여자들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임신한 채로 자살하려고 했지만,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녀는 아버지 집으로 가서 매달렸다. 이듬해 봄에 그녀는 아버지 집에서 아들을 낳았다. 내가 사생아를 낳았구나,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아이의 이름을 뭐라고 할 거냐고 물었다. 그녀는 아들의 이름을 지어줘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 했다. 이름이라니! 그녀는 대충 아이가 태어난 도시의 명칭을 따서 ‘패리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패리스가 태어난 지 일 년이 지나지 않아 아이작 싱어가 그녀를 찾아와 청혼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늠름해진 풍채와 어깨까지 내려오는 풍성한 그의 수염을 바라보았다. 아이작이 아들의 이름이 뭐냐고 물었고, 그녀는 패리스라고 대답했다. 로맨틱한 이름이군. 그가 대답했다. 이미 그녀는 그에 대한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지만,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들은 함께 미국으로 갔다. 하지만 거기에는 너무 많은 아이작의 여자들과 아이작의 자식들이 있었다. 그녀는 아이작에게 미국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영국 데번으로 건너갔고, 아이작은 그녀와 아들을 위해 호화 저택을 구입했다. 아이작은 아주 가끔 데번에 들렀는데 그럴 때마다 영국 왕족이나 귀족을 초대했다. 패리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다른 아이의 아버지보다 훨씬 더 늙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에 비하면 어머니인 이사벨라는 젊고 아름다웠다. 그 어떤 귀족 여자들보다도 그랬다. 이사벨라는 몸에 딱 붙는 이브닝드레스를 입었다. 그녀는 웃으며 손님들을 대했지만, 그들이 돌아가고 나면 입을 다물어버렸다. 아이작이 화를 내면 그녀는 새된 목소리로 물었다. “술집에서 이 빠진 채로 춤추는 여자들과 당신이 다를 게 도대체 뭐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패리스를 안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가버렸다. 그러면 아이작은 소리를 지르며 방문이 부서져라 두드려댔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슬픔에 빠진 목소리로 패리스에게 말했다. “얘야, 엄마 가문의 피에는 긍지와 고귀함이 깃들어 있단다. 가난했지만 그 고귀함을 지켜냈어.” 이사벨은 이렇게 덧붙였다. “네게도 그 피가 반이 섞여 있는 거야. 딱 절반이 말이야.” 그녀는 그를 꼭 끌어안았다. 그는 숨이 막혔지만 어머니가 자신을 놓아버릴까 봐 그런 내색은 하지 않았다. 잠시 후 하인이 가져다준 열쇠로 문을 딴 아이작이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아이작의 얼굴과 수염은 눈물인지 땀이지 모를 것으로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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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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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미
198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9년〈21세기문학〉신인상을 수상했고, 2011년〈동아일보〉신춘문예에 단편소설〈담요〉가 당선되어 등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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