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3.04.23 10:06 수정 : 2013.04.24 10:42

손보미 소설 <2화>


그가 일곱 살이 되던 해에 아이작 싱어가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가 심장마비로 죽기 며칠 전에 이사벨라는 아이작이 바깥에서 낳은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건 괜찮았다. 그녀를 화나게 한 것은 그가 그 딸에게 ‘이사벨’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사실이었다. 이사벨라는 너무나 분노해서 아이작의 장례식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패리스는 스물여섯 살 때 딱 한 번 자신의 이복 여동생인 이사벨을 만났다. 그 애는 스물두 살이었고 몹시 아름다웠다. 어머니인 이사벨라와 피 한 방울 안 섞였지만 이사벨라의 젊었을 적 모습을 그대로 보는 것 같다, 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왜 아버지가 그녀에게 그런 이름을 지어주었는지 알 것 같았다. 이사벨은 패리스의 손을 꼭 잡고 그의 이름을 부르며 작은 종달새처럼 말했다. “당신이 내 오빠예요?” 패리스는 그 손을 슬쩍 빼냈다. 그로부터 칠 년 후에 그는 자신의 이복 여동생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당시 그는 가족들과 나폴리의 별장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그는 릴리 그레이엄이라는 여성과 결혼해서 그 사이에 딸을 두고 있었고, 릴리는 패리스의 또 다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아이작은 이사벨라와 패리스 모자에게 엄청나게 많은 유산을 남겨주었다. 이사벨라는 겨우 스물아홉 살에 과부가 되었다. 패리스는 어머니를 위해 프랑스어를 배웠지만, 그다지 많이 사용하지는 못했다. 이사벨라는 집 안을 왕족, 귀족, 시인, 화가, 조각가, 학자, 음악가 들로 채웠다. 현악 사중주와 테너 가수를 불러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그들 집에 자주 머물렀던 예술가 중에는 바스톨디라는 조각가가 있었다. 그 당시 그는 미국으로 보낼 자유의 여신상을 조각 중이었는데, 사람들 사이에서 그 모델이 이사벨라라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바스톨디는 그것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그들 집에 바스톨디보다 더 많이 머물렀던 사람은 테너 가수이자 바이올리니스트로 명성을 날리고 있던 빅토르 레우브제뜨라는 이름의 남자였다. 빅토르는 자기를 독일 출신의 자작으로 소개했다. 빅토르가 바이올린을 켤 때 그는 어머니가 눈물을 닦아내는 것을 보았다. “저걸 좀 들어봐, 자작님이 켜는 바이올린이다. 고귀한 바이올린이다.” 예술이라면 지긋지긋하다, 고 생각한 그는 몇 년 후 케임브리지에 진학해서 의학과 화학, 그리고 공학을 공부했다. 문학이나 음악, 미술 쪽으로는 눈길도 돌리지 않았다. 그는 키가 크고 날씬하며 금발의 머리칼이 구불거리는 멋진 청년으로 자라났고, 그의 주위에는 친구들과 여자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가 최초로 사랑을 느낀 여성은 흔히 이사벨라가 말하는 고귀한 출신의 여성이 아니었다. 그는 어머니의 하녀인 헨리에타 마라이스와 사랑에 빠졌다. 헨리에타는 헝가리 출신으로 이미 서른도 훌쩍 넘은 여자였다. 그 당시 이사벨라는 빅토르와 바스톨디에게 동시에 청혼을 받았다. 그녀는 둘 중 빅토르와 정식으로 재혼을 준비 중이었으며, 행복의 절정을 맛보고 있었다. 사십 대 초반이었지만 이사벨라의 허리는 가늘었고 피부는 마치 도자기같이 매끄러웠다. 이사벨라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조용한 목소리로 패리스에게 말했다. “그런 천박한 여성과 결혼이라도 하겠다는 거니? 네 자식의 피를 그런 식으로 더럽히고 싶은 거야?” 그는 헨리에타와 파리로 날아갔다. 그는 헨리에타를 멍청한 예쁜이, 라고 불렀다. 멍청한 건 사실이었고 예쁜 건 사실이 아니었다. 그들은 파리에서 엄청난 돈을 뿌리며 생활했다. 하지만 석 달도 지나지 않아 그는 그 생활에 싫증을 느꼈다. 이제 헨리에타는 그저 뚱뚱하고 늙은 여자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뚱뚱하고 늙고 사치스러운 여자 하인이었다. 그는 헨리에타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지 않은 것을 신의 자비라고 생각했다. 오, 하느님. 그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는 헨리에타를 파리에 남겨두고 다시 데번으로,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는 자신이 이제 인생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한겨레출판 문학웹진한판 바로가기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손보미의 <고귀한 혈통>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