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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4.26 09:54 수정 : 2013.04.28 15:58

손보미 소설 <5화>



릴리는 더 이상의 임신은 원하지 않았지만, 결국 여섯 번째 임신을 했고 다섯째 아들을 낳았다. 패리스는 오 남매의 아버지가 되었다. 두 딸과 세 아들. 막내아들이 태어난 후에 그는 사업에 전념했다. 켑페라에 이탈리아풍의 성을 짓기도 하고, 전기 모터 자동차를 개발하기도 했으며, 에드워드 7세의 산드링헴 영지에 직접 전기 배선 시스템을 설치하기도 했다. 가끔 여자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아주 가끔이었다. 그가 대규모 의학 연구 단지 프로젝트 때문에 뉴욕에 가 있을 때, 그는 릴리로부터 이사벨라가 결혼한다는 전보를 받았다. 이사벨라는 이미 예순세 살이었다. 그는 당장 데번으로 갔다. 거기에는 이미 릴리와 다섯 아이들이 와 있었다. 릴리는 패리스의 얼굴을 쳐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어머니의 새 남편이 바스톨디라고 생각했지만 그 예상은 틀렸다. 이사벨라의 세 번째 남편은 폴 세이지라는, 이사벨라보다 스무 살 어린 케임브리지의 영문학 교수였다. 그러니까 패리스보다 겨우 한 살이 많았다. 에드워드 7세가 결혼식 증인으로 참석한 가운데 이사벨라는 성당에서 웅장한 결혼식을 올렸다. 그 어느 때보다도 화려한 결혼식이었다. 패리스는 허리에 나잇살이 붙은 어머니가 머리카락을 위로 말아 올리고 몸에 딱 달라붙는 드레스를 입은 채 상체에 흰 레이스 판초를 걸친 걸 지켜보았다. 어머니 머리에는 흰 수선화가 붙어 있었다. 그는 이제 두 살이 된 막내아들을 품에 안고 있었다. 나머지 아이들은 릴리 옆에 쪼르르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패리스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벽에 붙은 거대한 십자가가 보였다.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채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상을 보았다. 그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결혼식이 끝나고 그는 바로 뉴욕으로 갔다. 그는 자유의 여신상을 보면서 바스톨디가 이사벨라를 모델로 자유의 여신상을 만들었다던 그 말을 떠올렸다. 바스톨디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무 여자나 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패리스는 그 모든 유혹을 참아냈다. 몇 달 후 일을 끝마치고 런던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의 저택 현관에 붙어 있던 ‘건축가 싱어’라는 명패가 정원 잔디에 처박혀 있는 것을 보았다. 릴리는 패리스에게 이혼을 해달라고 말했다. 그는 이혼 같은 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없었다. 그는 릴리의 둥글고 아름다운 이마를 바라보았다. 이사벨라는 이혼은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런 식으로 서약을 깨뜨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절대로, 세상에, 절대로 안 돼.” 그는 막내아들만 남겨두고 나머지 아이들을 뉴욕에 있는 릴리의 친정으로 보냈다. 그리고 어디론가 떠나지 않고 런던 저택에 머물면서 릴리와 다시 잘해보려고 애썼다. 보석을 사다 날랐고, 그녀가 좋아하는 디자이너를 불러 수십 벌의 옷을 만들게 했다. 어느 날 저녁, 식사를 하려고 식탁 앞에 앉아서 릴리를 기다리던 그는 하인으로부터 릴리가 식사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는 알았다고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다, 고 그는 생각했다. 유모가 막내아들을 제 엄마에게 데리고 갔고, 그는 혼자 저녁을 먹었다. 다음 날에도 릴리는 식당에 나오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그리고 그다음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화가 난 목소리로 유모를 불렀고 막내아들을 데려오라고 말했다. 유모는 곤란해하면서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릴리의 침실로 가서 문손잡이를 돌렸다. 문은 잠겨 있었다. 그는 문을 쾅쾅 두드렸다. “꺼져버려요!” 릴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하인들에게 열쇠를 찾아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조금 있다가 그가 열쇠를 열쇠 구멍에 밀어 넣었다. 찰칵, 하는 소리가 났다. 릴리는 어두운 침실 바닥에 주저앉아 막내아들을 안고 있었다. 패리스의 얼굴과 수염은 눈물로 젖어 있었다. 패리스는 양손으로 릴리의 어깨를 거칠게 잡고 흔들면서 물었다. “아이에게 무슨 말을 했어? 아이에게 무슨 말을 했어?” 릴리가 울었다.

그는 그다음 날부터 릴리와 별거를 시작했다. 릴리는 이혼을 원했지만 그에게는 별거가, 릴리를 위해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이었다. 그는 파리로 건너갔다. 그는 센 강 변에 있는 저택을 사서 그냥 거기에 머물렀다. 그는 더 이상 어디론가 떠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곳으로 여자들을 불러들였다. 그 여자들은 거의 다 패리스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억만장자 패리스 싱어, 바람둥이 패리스 싱어, 난봉꾼 패리스 싱어. 그를 모르는 여자들도 있었다. 어떤 여자들은 그에게 몇 살이에요? 하고 물었다. 그는 마흔세 살, 이라고 대답하고 자신이 그토록 나이 먹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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