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3.04.29 10:46 수정 : 2013.04.30 09:39

손보미 소설 <6화>



첫째 딸, 프란체스카가 파리로 패리스를 만나러 온 것은 1909년 2월의 일이었다. 제 할머니인 이사벨라를 많이 닮은 그 아이는 이제 열다섯 살이었다. 그 애는 할머니가 자신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걸 알고 있었고, 그것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사벨라를 좋아했다. 언젠가 이사벨라는 패리스와 릴리 부부가 있는 자리에서 프란체스카에게 말했다. “네 이름은 정숙한 여자라는 뜻이야. 너는 고귀한 혈통의 아이니까 그 의미를 잘 새겨야 한다.” 프란체스카는 웃으며 대답했다. “알고 있어요.” 프란체스카는 어렸을 적부터 귀족들과 어울려 생활했다. 그 애에게는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함이 있었다. 그는 가끔 그 애가 제 엄마의 아름다운 이마를 물려받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프란체스카는 예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파리에 온 날부터 프란체스카는 가이테 극장에서 하는 무용 공연을 보러 가자고 패리스를 졸랐다. 그는 예술이라면 딱 질색이었다. 언제나 그랬다. 하지만 프란체스카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날 밤 그는 이사도라 덩컨이라는 미국 출신의 서른한 살짜리 무용수가 추는 춤을 보았다. 패리스는 무대 위로 한 여자가 걸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맨발에, 옛 그리스 여자들이 입었던 스타일의 옷을 입고……. 그는 무언가를 떠올렸지만 곧 잊어버렸다. 프란체스카는 그 공연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무용수와 인사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그는 프란체스카를 데리고 분장실로 갔다. 싱어 가문은 어디에든 갈 수 있었다. 이사도라가 말했다. “우리 예전에 만난 적이 있지 않아요?” 패리스는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누군가의 장례식이었어요.” 또다시, 프란체스카가 졸랐기 때문에 며칠 후에 패리스는 이사도라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자주 배를 곯았어요. 그때의 경험이 나를 춤추게 만들었죠. 강인한 영혼은 배를 곯는 것 따위에 지지 않으니까요.” 그날 밤에 프란체스카는 그에게 ‘배를 곯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물었다. 그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어쩌면 할머니가 알고 계실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 프란체스카는 ‘배를 곯는다’라는 표현을 잊어버렸다.

프란체스카가 파리를 떠난 후 그는 혼자 가이테 극장에 가서 이사도라의 공연을 또 보았다. 공연이 끝나고 그는 이사도라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이사도라는 파리가 너무 춥다고 말했다. 그는 곧바로 이사도라를 데리고 니스로 갔다. 그들은 그날 밤을 함께 보냈다. 패리스에게, 이사도라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런 여자였다. 패리스는 이사도라의 무용이 얼마나 뛰어난 건지는 몰랐지만, 그녀가 어떤 부류의 여자인지는 알았다. 그녀가 뿌린 염문들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출생에 대해 알고 있었고, 그녀가 데어도르라는 이름의 사생아를 낳은 적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는 이사도라가 파리에 머물 동안만 함께 지낼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사도라가 떠나가면,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녀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리려고 했다. 이사도라의 가이테 극장 공연이 연장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예상보다 좀 더 오래 만났다. 어느 날 패리스가 점심 식사를 하고 있는데 이사도라가 방문했다. 그녀는 패리스의 품에 안기며 자신이 임신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토록 많은 여자들과 밤을 보냈지만 그는 한 번도 누군가를 임신시킨 적이 없었다. 릴리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그의 아이를 임신한 적이 없었다. 패리스는 릴리를 제외하고 이 세상 그 누구도 자신의 아이를 낳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한겨레출판 문학웹진한판 바로가기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손보미의 <고귀한 혈통>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