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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4.30 09:34 수정 : 2013.05.01 11:13

손보미 소설 <7화>



패리스가 이사도라를 임신시켰다는 소식은 굉장히 빨리 퍼져서 런던에 있는 릴리와 데번에 있는 이사벨라에게까지 전해졌다. 릴리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여자가 당신 아이를 가졌다는 게 사실인가요?” 그가 사실이라고 이야기하자 릴리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패리스는 미안하다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도대체 무엇이 미안하단 말인가? 전화를 끊은 후, 그는 오랜만에 들은 릴리의 목소리를 기억하려고 애썼다. 잠시 후에 프란체스카가 다시 전화를 걸어서 그에게 물었다. “그 애가 아빠의 아이인가요? 저의 배다른 동생인가요?” 그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프란체스카가 말했다. “아빠, 괜찮아요, 괜찮아요.” 이사벨라는 몹시 화가 나서 다시는 패리스를, 아들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패리스와 그런 일이 있기 전부터 그녀는 이사도라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그녀는 이사도라가 예술을 더럽히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사벨라 앞에서 이사도라 이야기를 꺼낸 남자들은 다시는 이사벨라를 만나지 못했다. 그녀는 이사도라가 얼마나 천박한 집안의 출신인지도 알고 있었고, 온갖 남자와 놀아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춤을 출 때마다 허벅지를 다 드러내고, 때로는 가슴까지 보여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사벨라는 이사도라야말로 자신이 어렸을 적 아버지의 술집에서 보았던 이 빠진 여성 같은 부류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런 여자가 우리 가문의 아이를 낳는다는 말이냐?” 패리스는 전화기 너머,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날 밤, 이사벨라는 어렸을 적에 그랬던 것처럼 이가 하나도 없는 여자들이 나오는 악몽을 꾸었고, 패리스는 이사도라를 자신의 저택으로 불러들였다. 이사도라는 자신의 딸인 데어도르를 데리고 들어왔다.

몇 달 후, 이사도라가 아이를 낳던 날 밤에, 그는 문득 자신과 함께 잠을 잔 여자들을 떠올려보았다. 기억나는 여자들보다 기억나지 않는 여자들이 더 많았다. 그는 그 기억들을 더듬다가 자신의 죽은 여동생인 이사벨을 떠올리게 되었다. “당신이 내 오빠인가요?” 자신의 손을 꼭 잡던 그 아이. 그는 그때 이사벨이 끼고 있던 하얀색 장갑을 떠올렸다. 이사도라는 아들을 낳았다. 패리스를 쏙 빼닮은 아이였다. 그는 그 아이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릴리는 이제 오 남매의 얼굴을 볼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말라고 말했다. 그는 구역질이 날 거 같았다. 그들은 아이의 이름을 패트릭이라고 지었다. 1911년까지 패리스는 파리를 떠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항만 사업과 건축 사업을 벌였다. 어느 날 파리의 저택에 돌아온 그는 댄스홀이 사람들로 득실거리는 걸 보았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마지막 장이 댄스홀에 퍼지고 있었고, 이사도라가 맨발로 춤을 추고 있었다. 파리의 거의 모든 남자 예술가들이 거기에 모여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모자를 벗어 두 손에 들고 천천히 댄스홀로 걸어 들어갔다. 몇몇 남자들이 그를 알아보았지만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빈 소파에 조용히 기대앉아 이사도라가 추는 춤을 지켜보았다. 그 누구도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거기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댄스홀을 가득 메운 음악과 이사도라의 춤으로만 이루어진 것이었다. 패리스에게 음악과 그녀의 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패리스는 자기가 아주 동떨어진 세계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다리를 들어 올릴 때 허벅지가 드러났고, 그녀가 입고 있던 튜닉이 조금 흘러내려서 그녀의 가슴 윗부분이 노출되었다. 춤이 다 끝났을 때도 여전히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을 깬 것은, 패리스였다. 그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웃으며 박수를 쳤다. 이사도라는 숨을 헐떡이며 그에게 다가가서 키스했다. 그는 이 여자가 저 남자들 중 도대체 몇 명과 잤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패트릭, 그 아이는 내 아이가 맞는 걸까? 그토록 조심했는데 어떻게 저 여자가 내 아이를 임신할 수 있었던 걸까? 어째서 내가 실수를 했던 것일까? 왜 하필이면 저 여자였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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