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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5.01 10:56 수정 : 2013.05.15 15:17

손보미 소설 <8화>



그 이듬해는 여러모로 운이 좋지 않았다. 1월이 되자마자 이사벨라의 세 번째 남편 폴이 죽었다. 패리스는 드디어, 라고 생각했다. 장례식은 마치 이사벨라의 결혼식이 그랬던 것처럼 웅장하게 치러졌다. 그들의 결혼식에 증인을 섰던 에드워드 7세는 이 년 전에 이미 죽고 없었다. 이사벨라는 패리스를 보자마자 그의 두 팔에 안겼다. 일흔이 다 된 이사벨라는 젊었을 때의 아름다움은 잃어버린 지 오래였고, 이제 살이 많이 붙어서 둔해 보이긴 했지만, 늙었다기보다는 원숙하다는 느낌을 주는 편이었다. 릴리와 다섯 아이들도 와 있었다. 릴리는 패리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프란체스카가 동생들을 데리고 패리스에게 왔다. 그 아이들은 차례로 제 아버지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막내아들은 약간 쭈뼛거리다가 앙,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쉿! 네가 몇 살인데 이런 데서 우는 거야. 창피하지도 않아?” 프란체스카가 막내아들에게 따끔하게 말했다. 막내아들은 울음을 그치고 패리스의 볼에 입을 맞춘 후 제 엄마에게 달려갔다. 프란체스카는 패리스에게 물었다. “모든 게 괜찮은 거죠?” 그애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또 다시 질문했다. “내 이복동생은 잘 있어요?” 패리스는 당혹스러움을 느꼈다. 그는 프란체스카의 어깨를 잡고 말했다. “얘야, 걔는 네 동생이 아니야. 네 동생이 아니란다.” 릴리는 그 당시 유행하는 스타일의 드레스―허리선부터 발목까지 타이트하게 덮어서 허벅지 선이 드러나는―를 입고 있었고, 저 멀리서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릴리가 어색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이사벨라는 이번에는 눈물을 흘렸지만, 그는 그 눈물이 죽은 폴에게 보내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그 무엇에 보내는 것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날 패리스와 릴리, 그리고 다섯 아이들은 이사벨라를 위해 데번의 저택에서 하룻밤 머물기로 했다. 그들은 이사벨라를 위해 함께 저녁 식사를 했지만, 패리스와 릴리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밤에, 모두가 잠든 후에 패리스는 몰래 릴리의 방에 들어갔다. 릴리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는 릴리가 낮에 입었던 드레스―몸통에 딱 달라붙는―와 릴리가 가져온 다른 옷들―역시 유행을 따르고 있는―을 모두 챙겨서 나왔다. 그는 차를 몰아 근처에 있는 호수로 가서 그것들을 버렸다. 다음 날 아침 그는 릴리가 자기 몸보다 커서 헐렁헐렁한 이사벨라의 드레스―몸매를 절대 드러내지 못하는―를 입고 있는 걸 보았다.

그해 4월에는 교통사고로 데어도르와 패트릭이 죽었다. 이사도라는 큰 상실감을 느껴서, 거의 매일을 울면서 지냈다. 패리스 역시 몹시 큰 충격을 받아서 몇 달 동안 두문불출했다. 어느 날 밤에 이사도라가 울면서 그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패리스에게 아이를 가지게 해달라고 말했다. 패리스는 이사도라를 달랬고, 그녀가 잠들 때까지 깨어 있었다. 날이 밝자마자 그는 릴리를 만나러 런던으로 갔다. 릴리는 패리스에게 문을 열어준 하인에게 몹시 화를 냈고, 패리스를 보고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들은 응접실에 마주 보고 앉았다. 릴리는 패리스에게 차 한잔 대접하지 않았고,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바닥만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녀가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생긴 일은 정말 유감이에요.” 패리스는 응접실 한쪽 벽에 온갖 그림과 사진이 걸려 있는 걸 보았다. 릴리가 그걸 바라보고 있는 패리스에게 말했다. “저건 요즘 유행하는 화가의 그림이에요. 저건, 고흐예요. 미치광이였지만, 훌륭한 화가였죠. 이건 피카소예요. 피카소 알아요?” 갑자기 패리스가 릴리에게 말했다. “우린 아들을 낳아야 해.” 릴리는 불쾌감과 당혹스러움과 수치심을 느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모르겠어. 난 패트릭을 좋아한 적이 없어. 왜냐하면 그 애의 엄마가 당신이 아니었으니까…….” 그녀는 입을 쩍 벌리고 무슨 말인가 하려다 그만두고 그저 잠시 동안 패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세상에, 패리스, 불쌍한 패리스, 나를 봐요. 내가 몇 살인지 알아요? 나는 이제 마흔다섯이에요. 당신, 머리가 어떻게 된 거죠?” 패리스는 릴리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자세하게 릴리를 뜯어본 것이 얼마 만인지 알 수 없었다. 이사벨라가 지금의 릴리 나이였을 때는 훨씬 더 아름답고 육감적이었다. 그때 이사벨라는 그에게 왜 헨리에타 같은 여자와 사랑에 빠졌느냐고 물었다. 왜 그런 천박한 여성과 놀아나는 거냐고 물었다. 헨리에타와 헤어지고 데번으로, 다시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이 인생에 대해 뭔가 알았다고 생각했었다. 문득 그는 이사벨을 떠올렸다. 만약 이사벨이 살아 있어서 사십 대 중반이 되었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때 릴리가 울먹이며 말했다. “오, 불쌍한 패리스, 당신 모습을 좀 봐요. 당신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당신은 정말 아무것도 알지 못해요.” 패리스는 릴리의 눈물이 순수한 동정의 의미라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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