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보미 소설 <10화>
그는 문득 예전에 나폴리에서 휴가를 보냈던 때를 떠올렸다.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날 오후에 그는 아내와 딸 프란체스카와 함께 나폴리 해안으로 나와 일광욕을 했다. 그런데 호텔의 직원 한 명이 거기까지 그를 찾아와서 편지를 한 장 건네주었다. 딸아이는 끈이 달린 노란색 티와 앙증맞은 반바지를 입고 모래를 만지며 놀고 있었다. 릴리는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임신 때문에 부푼 배를 위로 하고 모래사장에 누워서 미소를 지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엎드려서 한 손을 아내의 배에 올린 채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건 이사벨의 유서였다. 이사벨은 자살하기 전날에 자신의 스물 몇 명의 이복형제 중 다섯 명에게만 편지를 보냈다. 그는 그날 저녁으로 소고기 카르파초와 앤초비가 들어간 피자, 그리고 생선튀김을 먹었다.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프란체스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를 불렀다. “뚜르네, 뚜르네, 뚜라 너어스로 뚜아 몬트 허브, 뚜르네, 뚜르네…….” 패리스와 릴리는 처음에 그게 무슨 노래인지 전혀 몰랐지만, 곧 릴리가 알아맞혔다. 전날 밤에 해변 근처에 있는 카바레에서 여가수가 부른 샹송을 엉터리 불어로 흉내 낸 것이었다. 그는 프란체스카의 영특함 때문에 무척 흡족했지만, 릴리는 프란체스카에게 말했다. “다시는 그 노래를 부르면 안 돼. 엄마한테 혼날 줄 알아.” 그리고 패리스에게 말했다. “이럴까 봐 내가 이렇게 어린 애를 그런 쇼에 데리고 가면 안 된다고 한 거예요.” 그는 프란체스카를 꼭 껴안고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그가 샹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릴리가 얼굴을 찌푸렸지만 곧 그냥 웃었다. “뚜흐네, 뚜흐네, 뚜아 모나무흐 뚜아 몽 헤브, 쎌라 발스 데떼 끼 누자 마히에.”* 몸을 돌려요, 몸을 돌려요, 그대 내 사랑, 그대 나의 꿈, 그리고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해주었던 여름날의 왈츠…….
릴리가 그의 어깨에 기댔다. 그리고 집게손가락으로 프란체스카의 코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다시는 저런 노래, 불러서는 안 돼.” 프란체스카는 죽을 때까지 그 노래를 다시는 부르지 않았다. 그날 밤, 패리스는 가족들이 다 잠들었을 때 혼자 서재에 남아 낮에 해변에서 건네받은 그 편지를 다시 한 번 더 읽었다.
“패리스 오빠, 몇 년 전에 만났을 때 제게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그때 오빠를 볼 수 있어서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그 이후로 또 만나고 싶었지만 그럴 기회가 오지 않은 것이 무척 슬퍼요. 오빠, 패리스 오빠, 이제 아마 영원히 볼 수 없게 되겠죠.”
편지를 다 읽고 나서 그는 방문을 잠갔다. 그리고 잠시 동안 울었다. 아주, 잠시 동안만. 그는 그 일이 자신에게 어떤 식으로 영향을 끼칠지 그런 건 전혀 알지 못했다. 인생은 그냥 그런 식으로 흘러가는 것이었다.
그는 런던 저택에 일주일을 더 머무르고 나서 어머니를 만나러 데번으로 갔다. 이사벨라는 이제 정말 할머니가 되었다. 머리는 하얗게 세었고 몸에는 살이 많이 붙었는데 특히 가슴이 엄청나게 거대해졌다. 그녀는 수다스러워졌고, 목소리도 몹시 커졌다. 그는 아무리 분노할 만한 일이 있어도 목소리를 낮추며 기품을 지키던 이사벨라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사실 때문에 몹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어머니의 주름진 볼에 입을 맞추고 서둘러 자신의 도시, 플로리다로 돌아갔다. 그는 가끔 릴리의 말―”당신은 정말 아무것도 알지 못해요”―을 떠올렸다. 그는 그 말을 뭉개는 방식으로 어린 여자들과 잠을 자는 걸 선택했다. 여전히 임신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는 더 이상 그 여자들의 눈에서 슬픔을 보지 못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게 만들 만한 그런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는 그저 그 모든 것을 빠르게 잊어가기만 했다.
이사벨라는 오래 살았다. 바스톨디를 비롯한 그 시대를 함께했던 예술가들이 하나둘씩 사라져서, 결국 그 집을 드나드는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그녀는 살아 있었다. 몇 년 후에 자신의 마지막 손자를 낳았던 이사도라 덩컨이 불의의 사고로 죽을 때도 그녀는 살아 있었고, 자신의 첫째 손녀인 프란체스카가 셋째 아이를 낳다가 죽은 후에도 살아 있었으며, 그리고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 패리스 싱어가 죽은 후에도 몇 년을 더 살았다.
* 몸을 돌려요, 몸을 돌려요, 그대 내 사랑, 그대 나의 꿈, 그리고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해주었던 여름날의 왈츠…….
(이상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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