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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5.06 10:26 수정 : 2013.08.07 14:41

황현진 소설 ⓒ전지은

황현진 소설 <1화>



우리에게는 여자와 바나나가 많아.

라디오를 켜면 그 노래뿐이었다. 우리에게 내려진 명령은 안전 구역으로 분류된 퐁니 마을을 평정하라는 거였다. 지프는 해안도로를 따라 계속 북상 중이었다. 마을은 북쪽 끝에 있었고 비씨들의 땅과 가까웠다. 마을을 평정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들은 이른바 우리 쪽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들의 농사를 도우면서 고기를 나눠 먹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운이 좋으면 그들 중 어리고 예쁜 여자를 골라 연애를 할 수도 있었다. 우리는 모처럼 음담패설을 나누며 긴 이동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영상 50도. 온도계의 수은점은 그 이하로, 그 이상으로도 움직이질 않았다. 북쪽으로 갈수록 라디오의 잡음은 점점 더 커졌다. 노랫소리는 자주 끊어졌다가 뜻을 알 수 없는 고음을 내지르며 이어졌다. 우리에겐…… 바나나가…….

퍽킹 바나나.

키스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좁은 짐칸 안에서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는 사람은 언제나 키스였다. 다른 병사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이었다. 더위에 지친 탓이기도 했지만 적군의 저격 대상이 될 위험도 컸다. 하지만 우리는 대개 키스의 장난에 환호했다.

아무리 더워도 한낮에는 짐칸의 덮개를 걷어낼 수 없었다. 우리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푹 숙인 채 허벅지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만들어내는 무늬를 보며 하루를 점치곤 했다. 오늘의 운세는 하트였다. 하필 키스의 바지에 커다란 하트 모양이 생겨났다. 우리는 키스의 허벅지를 툭툭 건드리며 야유를 보냈다. 키스는 킬킬거리면서도 젖은 바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키스는 유난히 땀을 많이 흘렸다. 고국의 추운 땅에서 건너온 키스에게 사시사철 덥기만 한 타국의 기후는 끊이지 않는 포성보다 끔찍한 거였다.

나와 키스는 동갑이었다. 우리는 부대원 중에서 어린 편에 속했다. 내가 키스보다 생일이 서너달 빨랐다. 나는 가끔 키스를 위해 물고기를 잡아다 주곤 했다. 강물에 수류탄을 던져 잡은 물고기는 성한 데가 없었다. 꼬리가 떨어져 나갔거나 아가미가 찢어져 있거나 아예 두 동강이 되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중의 절반은 건져낼 것도 없을 만큼 산산조각이었다. 다행히 키스는 물고기를 좋아했다. 김치를 보급받은 뒤부터 키스의 식성은 나날이 좋아졌다. 키스의 얼굴은 더욱 번들거렸다. 두어 달쯤 지났을 때는 매끄럽던 턱에 거뭇거뭇한 수염이 돋아나는가 싶더니 보름 만에 빳빳한 검은 털이 키스의 턱을 뒤덮었다. 아무리 봐도 나와 스무살 동갑내기 같지 않은 얼굴이었다. 키스의 턱수염 아래에는 항상 잿빛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키스가 갑작스레 몸을 움직일 때마다 땀방울이 이리저리 튀었다.

바나나는 우리도 많아.

나도 키스를 따라 어둠에 대고 농담을 던졌다. 연이은 말장난에 폭소가 터졌다.

웃으면 더워.

키스는 미처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손부채질을 하며 수통을 열었다. 그 순간 모두가 갈증을 느꼈다. 우리는 동시에 목을 뒤로 젖혀 수통의 물을 비웠다. 수통에서 비린내가 났다. 우리는 탄피통에 넣어둔 사탕과 초콜릿을 꺼내 나눠 먹었다. 그러곤 오랫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가끔 여전히 땀을 줄줄 흘리며 허벅지를 하트 모양으로 적시고 있는 키스를 힐긋거릴 뿐이었다.




황현진(소설가)





황현진

2011년 장편소설《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로 제16회 문학동네작가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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