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3.05.07 10:13 수정 : 2013.05.15 15:17

황현진 소설 <2화>



밤이 왔다. 밤의 주인은 비씨들이다. 다행히 오늘은 달이 컸다. 밝은 밤이었다. 내일은 보름달이 뜰 것이다. 우리의 밤눈도 더욱 밝아질 터였다. 트럭 뒤 칸에 빽빽이 모여 앉은 우리의 머리통 위로 하얀 김이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한낮 동안 뜨겁게 달궈진 우리의 정수리는 새벽녘이 되어도 식을 줄 몰랐다. 벌써 열 시간째, 트럭은 세로로 길게 뻗은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길은 고르지 않았다. 지프는 연신 덜컹거렸다. 도로 곳곳에 깊게 파인 데가 많았다. 가끔 차바퀴 아래에서 무언가 짓이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작은 짐승의 사체이거나 죽은 자의 몸에서 떨어져 나온 팔이나 발목일 수도 있었다. 그때마다 키스는 습관처럼 낮게 중얼거리곤 했다.

천국으로.

운전병은 종종 핸들을 놓쳤다. 우리는 서로의 어깨를 밀며 한쪽으로 기울어지거나 금방이라도 밖으로 튕겨 나갈 것처럼 높이 솟구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차는 단 한 번도 길 밖으로 이탈하지 않았다. 전조등을 켜지 않고도 차는 같은 속도로 빠르게 달렸다. 자칫 속도를 늦췄다간 매복 중인 적군이 언제 튀어나올지 몰랐다. 우리는 구토를 참는 데 이미 이력이 났다. 총을 쏘는 일에는 진력이 났다.

탁 트인 바다가 펼쳐졌다. 달빛에 사방이 훤했다. 지프가 섰다. 뒤따라오던 다른 소대의 차들도 일제히 속도를 줄였다. 소대장이 조수석에서 내렸다. 짐칸을 돌아보며 빨리 화장실에나 다녀오라고 재촉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우리는 바지 지퍼를 내렸다. 우리에게 바다는 화장실이었다. 운전병은 곧바로 튀어 나가 바다 쪽으로 달려갔다. 엉덩이를 한껏 뒤로 빼고 뒤뚱거리며 뛰는 꼴이 우스웠다. 운전병은 곧장 바지 지퍼를 내리고 오줌을 갈겼다. 우리는 줄줄이 차에서 뛰어내렸다.

해피 뉴 이어.

열의 맨 뒤에서 내릴 차례를 기다리던 키스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퍽!

모두가 동시에 소리쳤다. 우리는 미군의 말을 빨리 배웠다. 컴 온. 지저스. 헤이. 퍽. 키스 그리고 해피 뉴 이어. 새해가 한참 지난 후에도 키스는 툭하면 해피 뉴 이어라고 외쳤다. 도대체 언제까지 새해 인사를 하고 다닐 참이냐고 소령이 물었을 때, 키스는 귀국선에 올라타는 그 날까지라고 단숨에 답했다. 소령이 키스에게 웃으며 말했다.

네가 1969년까지 살아 있길 바란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지포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알싸한 등유 냄새가 퍼졌다. 불꽃이 줄지어 나타났다가 찰칵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키스의 지포라이터에는 고향의 주소가 새겨져 있었다. 우리는 키스의 라이터를 볼 때마다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도무지 목줄이 끊어진 군번을 상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의 시선을 눈치챈 키스가 늘 하던 말을 또 꺼냈다.

나는 고아야. 전쟁고아. 고향에 돌아가려고 새긴 게 아니야. 돌아갈 수 없어서 새긴 거지. 나 대신 고향의 주소를 기억해줄 사람이 없거든.

키스는 일부러 모래밭에 호를 그리며 오줌을 눴다. 몸을 좌우로 크게 흔들면서, 킬킬거리면서 바닷바람을 맞았다. 키스의 젖은 턱수염이 밤바람에 쉬이 말랐다. 나는 키스가 하는 짓을 모두 따라 했다. 허리를 뱅뱅 돌리며 오줌을 길게 눴다. 키스의 행동을 따라 하다 보면 괜스레 신이 났다. 키스는 도리어 그런 나를 즐거워하는 눈치였다.




한겨레출판 문학웹진한판 바로가기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황현진의 <키스와 바나나>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