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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5.13 09:52 수정 : 2013.05.15 15:18

황현진 소설 <6화>



날이 밝아왔다. 비씨들이 잠을 잘 시간이었다. 우리는 라디오 소리를 키웠다. 돌연 잡음이 커졌다. 도저히 맞는 주파수를 찾을 수 없었다. 노래를 들으려면 누구에게 노래를 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도 노래를 부르려 하지 않았다. 소대장 눈치를 안 볼 수 없었다. 또다시 땀이 흘러내렸다. 검게 탄 얼굴이 금세 번질거렸다. 입을 열면 군내가 풍겼다. 온도계는 어느새 깨졌다. 이제 영상 사십 도인지 오십 도인지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군화에 침을 뱉었다. 키스가 갑자기 캐럴을 불렀다. 어떤 노래를 불러도 후렴은 항상 똑같았다. 라디오가 우리에게 제대로 가르쳐준 팝송은 하나뿐이었다. 우리에게는 여자와 바나나가 많아.

키스의 노랫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우리는 조수석에 앉은 소대장의 뒤통수를 흘깃거렸다.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어쩌면 잠든 것일지도 몰랐다. 우리는 키스가 노래를 부르도록 내버려두었다. 슬그머니 손뼉까지 치기 시작했다. 몇몇이 노래를 따라 부르는가 싶더니 한입이 되어 목청껏 소리를 질러댔다.

불에 탄 바나나 숲이 나타났다. 인가가 가깝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눈에 보이는 풍경이라곤 움푹 파인 폭탄 구덩이와 말라죽은 야자나무, 부서진 바위와 흙먼지, 낮은 모래 언덕뿐이었다. 소대장이 차창을 내려 하차 준비를 하라고 소리쳤다. 우리는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군화 끈을 다시 매고 철모를 고쳐 썼다. 상의 주머니에 지포라이터가 잘 들어 있는지도 확인했다. 가슴에 총알을 맞고도 지포라이터 덕분에 살아남았다는 어느 병사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난 뒤부터 지포라이터는 두고 온 애인 사진보다 소중한 부적이 되었다.

1번 국도는 마을 입구를 관통했다. 길가에 커다란 보리수나무가 혼자 서 있었다. 나무 그늘 아래 지프가 섰다. 우리는 각 소대 순으로 1열 종대를 지어 섰다. 첨병조가 앞장섰다. 늘 그래 왔듯이 키스가 선두에 섰다. 우리는 평소보다 긴장이 풀린 상태였다. 안전지역 안으로 들어온 탓이기도 했고, 오는 내내 노래를 불러댄 탓도 있었다.

우리는 보리수나무 그늘 아래 서서 키스의 신호를 기다렸다. 소대장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항상 모자라는 담배가 소대장 주머니에선 남아돌았다. 우리는 뜨악한 시선으로 소대장이 담배에 불을 붙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소대장이 담뱃갑을 돌렸다. 고마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갑자기 열의 맨 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손가락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거기 커다란 뱀이 누워 있었다. 싯누런 흙바닥에 검은 뱀이 기다란 몸을 곧게 편 상태로 비늘을 번득이고 있었다.

산 거야, 죽은 거야?

소대장이 총을 겨눴다.

이미 죽은 거다.

중대장이 그를 말렸다. 그 순간 마을 쪽에서 지뢰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1소대의 몇몇이 소리 나는 쪽으로 뛰어갔다. 중대장이 외쳤다. 공격, 공격! 그는 얼른 지프에 올라탔다. 우리는 거총자세로 전속력을 다해 달렸다. 우리 옆으로 중대장의 차가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지프는 마을을 향해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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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황현진의 <키스와 바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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