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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5.16 10:19 수정 : 2013.05.20 10:26

황현진 소설 <9화>



곧이어 미군 부대가 도착했다. 그들은 여자를 들것에 실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귀가 담긴 주머니를 건넸다. 그들은 주머니를 내버렸다. 그러곤 한마디 했다.

너희는 평정에 실패했어.

우리는 그들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치켜 보였다. 그들은 실실 웃기만 했다. 아주 재밌는 일을 구경하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우리 모두를 향해 크게 웃었다. 갑자기 우리의 머릿속으로 속았다는 생각이 빠르게 지나갔다. 귀를 버리다니. 우리는 보리수나무 그늘 아래 모여 고장 난 라디오를 부수며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화를 식혔다. 누가 우리의 뒤통수를 후려쳤는지 알 수 없어서 그랬다.

키스의 시신은 우리에게 다시 돌아왔다. 우리는 약식으로나마 키스의 장례를 치르기로 합의했다. 젖은 땅은 쉽게 파헤쳐졌고, 우리는 적들을 묻을 때보다 훨씬 깊게 구덩이를 팠다. 봉분 없이, 키스는 적의 땅에 묻혔다. 남은 것은 키스의 고향 주소가 새겨진 지포라이터뿐이었다. 키스의 고향은 고국의 가장 북쪽 땅에 있었다. 우리 중 누구도 갈 수 없는 주소였다.

괜히 여기까지 왔나 봐.

키스의 지포라이터를 켜면서 내가 말했다.

키스가 들으면 기분 나쁠 말일까?

나는 지포라이터의 뚜껑을 닫으며 말했다.

천국으로.

더 이상 우리에게는 할 말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날 이후 우리는 종종 키스가 생각날 때마다 말했다. 천국에는 여자와 바나나가 많아. 우리의 농담 섞인 위로가 키스에게 전해졌을지는 알 수 없었다. 중대장은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우리는 중대장 없이 계속 북쪽으로 걸었다. 걷는 도중에 사람을 만나면 모조리 쏘아 죽였다. 이봐, 천국에는 여자와 바나나가 많아. 잘 지내라고. 우리는 시체들을 밟고 지나가며 죽은 자들에게도 농담을 건넸다. 우리는 그게 일종의 기도라고 생각했다. 물론 기도는 짧았다. 우리의 신에게 바치는 기도가 아니었으니까. 그들의 천국에도 바나나는 많을 것이었다. 그들의 신이 바나나를 만들었을 테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가 될 거라고 우리는 믿었다.

우리에게 내려진 단 하나의 명령은 평정이었다. 이 축축한 나라에 발붙이고 있는 모든 종들을 썩은 바나나처럼 만드는 것.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몰살시켜라. 우리는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려 노력했다. 적어도 그때의 우리에겐 여자도 바나나도 충분하지 않았으니까. 넘치는 것은 오로지 총알뿐이었고, 우리가 원하는 것은 더 많은 바나나였다.

어느 날, 소령이 우리를 일렬로 세워두고 필요한 거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제일 먼저 손을 들고 대답했다.

다른 걸 하고 싶습니다.

소령은 웃었다. 그러곤 커다란 통을 가져오게끔 했다. 우리는 모처럼 뜨거운 물에 목욕을 했다. 커다란 통 안에서 발가벗고 묵은 때를 씻었다. 몸에서 쉼 없이 모래가 쏟아져 나왔다. 목욕을 마친 우리는 발가벗고 돌아다녔다. 키스가 살아 있었더라면 빨개진 바나나를 덜렁거리며 춤을 추었을 텐데. 다들 아쉬워했다. 그렇다고 내가 나서서 춤을 출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나는 마른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중얼거렸다. 저녁에 바나나가 주어졌다. 바나나는 너무 달아서 금방 질렸다.

얼마 후 우기가 다가왔다. 우기가 끝날 때 즈음, 우리는 다 함께 귀국선을 타고 고국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전쟁이 끝나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총을 버려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평정은 우리의 몫이 아니었다. 무료해진 우리는 고국에서 온 편지들을 다시 꺼내어 읽었다. 연초에 북쪽에서 무장한 공비들이 내려와 총격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뒤늦게 입에 올랐다. 그러다 제대하면 뭘 하고 살지, 서로를 걱정하며 밤을 새웠다. 며칠 새 이야깃거리는 다 떨어졌고 우리는 밤마다 라디오를 찾았다. 라디오는 모두 고장 나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노래를 들을 수 없었다. 아무도 온종일 쏟아지는 폭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우리는 그저 화를 내며 빨리 새 라디오를 달라고 아무 상사에게나 졸랐다. 1969년이 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가 한 일이라곤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이상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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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황현진의 <키스와 바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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