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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식 소설 ⓒ전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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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식 소설 <1화>
런던의 겨울 안개는 페스트만큼이나 지독했다. 도시를 점령하고, 건물들을 집어삼키고, 사람들의 얼굴에 우울한 표정을 심어놓았다. 가로등 불빛마저 병든 짐승처럼 몽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찰스 군, 커피 한잔 부탁하네.”
아침 일찍 출근한 영국의 역사학자 토마스 하버 박사는 연구실 책상에 앉자마자 강의 시간표부터 확인했다. 영국의 고대사에 관한 두 시간짜리 교양 강의와 프랑스 혁명을 다루는 전공 필수 강의가 잡혀 있었다. 두 강의 사이에는 학장과의 면담 일정도 있었다. 하버 박사는 의자에 등을 기대며 잠시 눈을 감았다. 빠듯한 일정과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과를 생각하니 숨이 막혔다. 휴우, 하버 박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쉬었다.
“벌써 이 주째 날씨가 이 모양이네요. 교수님도 우울증에 걸린 건 아니시죠?”
조교 찰스 군이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날씨 이야기를 꺼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 안개는 정말 지독했다. 모든 걸 눅눅하고 뿌옇게 만들었다. 국영 채널에서는 코미디 프로의 방영 시간을 두 배 이상 늘렸다. 라디오에서도 활기찬 음악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런 노력도 우울증에 걸려 자살하는 사람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걱정 말게, 찰스 군. 나는 아직 이 세상이 살 만한 곳이라고 생각한다네.”
“저에게도 세상이 아직 살 만한 곳이었으면 좋겠네요.”
박사 논문 준비에 쫓기고 있는 찰스 군이 이렇게 죽는소리를 할 때마다 토마스 하버 박사는 씨익, 웃는 얼굴로 받아주곤 했다.
“껍질을 깨야 날아갈 수 있을 걸세.”
하버 박사는 커피를 마시며 자기 앞으로 도착한 우편물들을 확인했다. 학계에서 세미나를 개최한다는 안내문이 몇 장, 뒤늦게 제출한 학생들의 리포트가 몇 통. 하지만 그날은 좀 색다른 우편물이 그 속에 끼어 있었다. 제법 두툼하고 무거웠다. 모양으로 보나 무게로 보나 서적류 같았다. 토마스 하버 박사의 눈길을 끈 것은 겉봉투에 적혀 있는 발신인의 이름이었다.
러드 장군.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다. 네드 러드는 19세기 초 영국의 공장 노동자였다. 재미있군, 19세기 초 네드 러드가 보낸 우편물이라……. 이런 유의 기발한 장난이라면 언제든지 대환영이었다. 토마스 하버 박사는 유쾌한 마음으로 봉투를 뜯었다. 거기에는 A4 용지를 제본한 한 권의 노트와 이런 편지가 들어 있었다.
친애하는 토마스 하버 박사님께.
먼저 교수님의 멋진 콧수염에게 안부를 묻고 싶군요. 설마 사랑의 아픔 때문에 잘라버린 건 아니시겠죠? 이건 제자로서 드리는 진심 어린 충고입니다만……. 콧수염을 자르면 교수님의 인기도 끝장날 겁니다. 부디 면도기를 멀리하시길.
발송인은 에드먼드 크럼프턴이라는 졸업생이었다. 하버 박사는 십 년 전 제자인 에드먼드의 얼굴을 떠올렸다. 엉뚱한 질문으로 교수들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곤 했던 에드먼드였지만 토마스 하버 박사는 영특하고 재기 발랄한 학생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에드먼드는 특히 19세기 초 영국의 산업혁명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에드먼드는 찰스 디킨스 소설에 등장하는 도시 빈민들의 생활상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래서 박사 논문도 네드 러드를 주제로 한 내용이었다. 네드 러드는 당시에 일어난 러다이트 운동의 시발점이 되는 인물이었다. 거세게 밀려오는 산업혁명의 물결에 맞서 기술 혁신 반대를 외친 이들은 네드 러드를 ‘러드 장군’이라고 불렀다.
기뻐해 주십시오, 교수님. 드디어 제가 네드 러드의 일기를 발굴했습니다. 원본은 물론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보내 드린 노트는 당연히 복사본이고요. 네드 러드의 일기라니, 믿어지십니까, 교수님?
에드먼드가 흥분하는 것도 당연했다. 네드 러드는 지금까지 가공의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 네드 러드의 일기가 발견된 것이다. 하버 박사 역시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에드먼드의 편지를 다 읽고 난 하버 박사는 비록 복사본이지만 네드 러드의 일기를 떨리는 손으로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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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식(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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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식
2012년 장편소설《굿바이 동물원》으로 제17회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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