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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5.21 10:20 수정 : 2013.05.29 09:54

강태식 소설 <2화>



1809년 12월 19일. 안개와 비.

기록의 첫날이었다. 연대는 물론, 일기를 쓴 날짜와 그날의 기상 상태까지 매우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하버 박사는 잠시 눈을 감고 1809년의 영국을 떠올렸다. 이백몇 년 전의 영국이라……. 19세기 초 영국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눈앞에 펼쳐졌다.

오늘은 천사 고아원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마리아 수녀님에게서 선물도 받았다. 노트와 연필이다.

“네드,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선 안 돼. 이 노트에 너의 하루하루를 붙잡아 두렴. 하나님께서 너의 앞길을 축복해주실 게다.”

나는 마리아 수녀님을 마귀할멈이라고 놀리기만 했는데……. 죄송한 마음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말썽을 일으킬 때마다 빗자루를 들고 쫓아오던 마리아 수녀님의 모습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길바닥에 버려진 나를 키워준 이 천사 고아원도 영원히 기억할 테다. 울보 아니카와 그녀의 인형 베티도, 싸움꾼 짐과 녀석의 호적수 존도 그립겠지.

“나는 돈을 아주 많이 벌 거야.”

짐은 입버릇처럼 말했다.

“부자가 되면 나를 버린 녀석들도 후회하겠지.”

짐은 내일부터 공장에 나가 일한다. 며칠째 아이들을 붙잡아 놓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말수가 적은 존도 짐과 같은 공장에서 일하게 된 모양이다. 나는 조만간 마리아 수녀님의 소개로 조니 앤 제이콥 공장에 찾아가 면접을 볼 예정이다. 지금은 조니 앤 제이콥 공장에서 양말을 만든다는 것밖에 모른다.

지금까지 네드 러드는 베일에 싸인 인물이었다. 나이는 물론 성장과정, 출생과 사망 연도까지, 네드 러드에 관한 모든 것들은 런던의 겨울 안개에 뒤덮인 듯 모호하고 흐릿하기만 했다. 당연히 네드 러드를 둘러싼 가설과 억측도 많았다. 그중에는 네드 러드가 고아원 출신일 거라는 설도 있었다. 만약 일기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그 설이 정설로 채택되는 셈이었다.

잠깐 생각에 잠겨 있던 토마스 하버 박사는 일기의 다음 페이지를 펼쳤다. 1810년 1월 5일. 기록의 첫날에서 보름 가까이 지난 날짜였다. 날씨는 ‘눈’이라고 적혀 있었다. 런던은 강설량이 적은 도시다. 예외적인 날씨라고 생각하며 토마스 하버 박사는 그날의 기록으로 눈을 돌렸다.

“교수님, 수업 시간 다 됐는데요.”

찰스 군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니 수업 시간 오 분 전이었다. 연구실 동으로 쓰는 별관에서 수업이 있는 본관까지의 거리는 대략 삼백 미터, 눈썹이 휘날리도록 뛰어도 빠듯한 시간이었다.

“적절한 충고 고맙네, 찰스 군. 자네는 정말 충실한 조교야.”

하버 박사는 교재를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드 러드의 일기는 책상 서랍에 넣어두었다.

“누가 내 책상에 손을 대나 잘 감시해 주게. 일 미터 안으로 접근하면 사살해도 좋아.”

연구실 문을 나서는 하버 박사의 등 뒤로 찰스 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개 속에서 길 잃어버리지 않게 조심하세요.”

일과를 마치고 연구실에 돌아온 하버 박사는 자리에 앉자마자 책상 서랍부터 열었다. 다행히 네드 러드의 일기는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찰스 군을 일찍 퇴근시킨 것도 연구실에 혼자 남아 네드 러드의 일기를 읽기 위해서였다. 수업 시간에도 그 생각뿐이었다. 수업을 어떻게 했는지, 진도는 어디까지 나갔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학장과의 면담이 곤욕스러웠다. 학장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토마스 박사, 내 이야기 듣고 있는 겁니까?”

수업 방식과 강의 내용에 관한 면담이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하버 박사의 개방적인 수업 방식은 인기가 높았다. 딱딱한 정사보다는 비밀결사나 위인의 사생활 같은 역사 이면의 역사를 위주로 하는 강의 내용도 학생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한두 명쯤 그렇지 않은 학생들도 있었다. 연례행사처럼 학기마다 학장실로 불려가는 것도 그런 학생들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방금 뭐라고 하셨죠?”

학장의 잔소리가 길어졌다. 하지만 끝도 없이 계속되는 학장의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하버 박사의 머릿속에는 네드 러드의 일기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해가 진 이후에도 지독한 안개는 여전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불빛들이 물에 잠긴 듯 몽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버 박사는 머그잔에 물을 가득 붓고 거기에 인스턴트커피를 연하게 탔다. 실내조명을 끄고, 대신 스탠드를 켰다. 삭막하기만 했던 연구실 분위기가 조금은 아득해진 기분이었다. 책상에 앉은 하버 박사는 몇 모금의 커피로 얼어 있던 몸을 녹였다. 그런 다음 기대에 찬 표정으로 양손을 비비며 네드 러드의 일기를 넘기기 시작했다.

1810년 1월 5일. 눈.

조니 앤 제이콥 공장에서 일한 지도 일주일이 지났다. 아침 여덟 시에 일을 시작해서 밤 열한 시까지 기계를 돌린다.

“열한 살이라고 했나, 네드? 한 사람 몫을 충분히 해낼 나이군.”

사장인 조니 씨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기대가 크다고 했다. 조니 씨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 기계를 돌리는 일은 어렵지 않다. 빠른 손놀림으로 같은 작업을 반복하면 된다. 방적기가 돌아가는 속도에 맞춰 몸을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먼지가 가득한 공장에서 하루 종일 방적기 소음에 시달리다 보면 몸은 어느새 녹초가 된다. 더러운 템스 강을 따라 빈민촌 두 곳과 사창가 한 곳을 거쳐 하숙집에 도착하면 언제나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다.

“네드, 나랑 같이 술이나 한잔할래?”

톰 아저씨다. 하숙집 입구에서 마주치면 술을 사달라고 조른다. 빨개진 코에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톰 아저씨를 ‘주정뱅이 톰’이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몇 번 같이 마신 적도 있었다.

“나도 한때는 조니 앤 제이콥 공장에서 일했지.”

하지만 지금은 실업자다. 그냥 주정뱅이 톰일 뿐이다. 항상 술에 취한 얼굴로 사람들에게 시비를 거는 주정뱅이 톰 아저씨.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든다. 톰 아저씨 대신 내가 일하고 있는 건 아닐까? 미안한 마음에 몇 번 더 술을 샀다. 하지만 요즘은 너무 피곤해서 피하고 있다. 하숙집 입구에서 마주쳐도 거절한다.

“너 지금 일한다고 으스대는 거냐? 망할 놈 같으니라고.”

지난번에는 멱살까지 잡혔지만, 정말 너무 피곤하다. 일기를 쓰고 있는 지금도 자꾸만 하품이 나오고 눈꺼풀이 내려간다. 내일 아침 7시면 기상나팔 로저 씨가 찾아와 창문을 두드릴 것이다. 그때 일어나려면 빨리 자두어야 한다. 잠자리 기도를 못 한 지도 한참 됐다. 마리아 수녀님,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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