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식 소설 <4화>
네드 러드의 일기에서도 이러한 사회상은 그대로 드러난다. 1810년 1월 23일 자 기록이다.
오늘은 사장인 제이콥 씨의 아들이 공장에 방문했다. 비싼 외투 속에 체크무늬가 들어간 멋진 재킷을 입고 있었다. 모자 밑으로 보이는 금발이 잘 익은 밀밭처럼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손에 낀 가죽 장갑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저런 걸 사려면 나는 이곳에서 몇 달이나 일해야 할까? 키는 나와 비슷했다. 대신 혈색이 훨씬 좋아 보였다. 덩치도 나보다 훨씬 컸다. 알고 보니 나이도 나와 동갑이었다. 녀석의 이름은 척 베넷이었다.
여기까지 읽은 토마스 하버 박사는 잠깐 고개를 들어 연구실 창밖을 응시했다. 저 멀리 안개에 점령당한 런던의 야경이 흐릿하게 펼쳐져 있었다. 척 베넷이라는 이름이 자꾸만 머릿속에 맴돌았다. 하버 박사는 차갑게 식어버린 커피 한 모금을 입안에 물고 생각에 잠겼다.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자신의 논문에서도 거론한 적이 있는 이름이라 기억을 되살리는 데도 어려움이 없었다.
1830년은 영국의 노동당이 창당된 해였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836년, 노동당의 의원 중 스물아홉 명이 그해에 열린 총선거에서 당선돼 의회에 진출한다. 그중 한 명이 척 베넷이었다. 젊은 변호사 출신의 척 베넷은 특히 노동자들의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의회에 진출한 이후에도 척 베넷은 왕성한 활동을 벌인 인물로 유명했다. 노동조합의 권리를 주장하는 한편, 보수 자본가들 편에 서 있는 정부에 맞서 사회 개혁을 부르짖기도 했다. 1856년, 향년 5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척 베넷은 임종의 순간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긴다.
“저는 노동자를 위해 일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인간을 위해 일한 것뿐입니다.”
당시 척 베넷은 ‘양치기 개’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늑대처럼 착취를 일삼는 자본가들로부터 노동자들의 인권을 지키는 양치기 개 척. 그 척 베넷이 공장주의 아들이었고, 그 공장에서 네드 러드와 만나게 되다니……. 하버 박사는 예기치 못한 전개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이 둘의 만남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궁금하기도 했다. 토마스 하버 박사는 일기의 다음 부분을 계속 읽어나갔다.
수다쟁이 질 아줌마가 녀석의 뒤를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었다. 도련님, 도련님 해가면서 녀석의 비위를 맞추던 질 아줌마는 작업에서 열외된 게 좋은지 사마귀가 박힌 코를 킁킁대면서 계속 싱글벙글 웃는 얼굴이었다. 행운아는 한 명 더 있었다. 녀석의 말 상대로 나 역시 질 아줌마와 함께 작업에서 열외되는 행운을 누렸다.
녀석은 질 아줌마만큼이나 말이 많았다. 공장을 돌아다니는 동안 계속 웃고 떠들어댔다. 말 상대로 뽑힌 나 역시 녀석의 박자에 장단을 맞춰야 했다. 그러는 동안 부잣집 도련님의 명랑함에 전염되었던 걸까. 쓸데없이 말수가 늘고, 작은 일에도 웃음이 헤퍼졌다. 시간은 그런대로 즐겁게 흘러갔고, 나도 녀석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거 먹을래?”
녀석에게서 주황색 사탕도 받았다. 색깔이 들어간 사탕은 처음이었다. 고아원에서도 성탄절이나 추수감사절에는 사탕을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흰색 사탕이었고, 몇몇 운이 좋은 아이들만이 검은색 사탕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검은색 사탕을 차지할 만큼 운이 좋은 아이가 아니었다. 주황색 사탕에서는 오렌지 맛이 났다. 혀끝으로 파고드는 아찔한 달콤함. 어디선가 신나고 경쾌한 음악이 들려왔다. 공장 안이 오렌지빛으로 물들었다. 기계 앞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도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주황색 사탕은 금방 녹아 없어졌다. 음악은 기계 돌아가는 소리로, 공장은 다시 어두운 회색으로 변했다. 그 속에서 우울한 표정의 사람들이 기계를 돌리고 있었다. 녀석의 불룩한 주머니에서 주황색 사탕들이 달그락 소리를 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걸 달라고 할 용기가 없었다.
“너도 이 공장에서 일하니?”
나는 우울한 목소리로 “응”이라고 대답했다.
“그럼 기계를 돌려봐.”
녀석은 왜 갑자기 나에게 그런 요구를 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기계를 돌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녀석은 나에게 명령했다. 녀석은 사장의 아들이었다. 나는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기계를 돌렸다.
다시 공장 견학을 시작했지만 녀석은 더 이상 수다를 떨지 않았다. 나 역시 말을 걸지 않았다. 녀석은 말 상대인 나를 불편해하는 것 같았다. 질 아줌마에게만 몇 마디 던질 뿐, 나에게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나에게도 그런 부잣집 도련님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헤어질 때까지 우리는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다.
두 소년의 침묵 속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노동자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양치기 개 척도, 러다이트 운동의 시발점이 되는 네드 러드도 당시의 시대상을 뛰어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너무 어렸다. 토마스 하버 박사는 불편한 마음으로 침묵 속에 잠겨 있는 두 소년을 생각했다. 노동에 대한 공포와 지배자로서 느끼는 두려움, 가진 자에 대한 증오와 거기에서 오는 열등감, 19세기 초 영국의 사회상은 열한 살짜리 소년들이 짊어지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이었다.
열다섯 장 정도의 노트를 넘기는 동안 네드 러드의 일기 속에서는 석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특별한 사건도, 눈길을 끄는 인물도 등장하지 않는 일상적인 내용이었다. 공장에서의 힘든 육체노동, 언제나 부족한 수면 시간,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얻어지는 건 형편없는 식사뿐이었다. 기계를 돌리면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네드 러드의 모습은 토마스 하버 박사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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