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태식 소설 <5화>
1810년 4월 7일. 하늘에는 검은색과 회색의 물감을 마구 휘저어놓은 듯 무거운 먹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아침부터 내린 비로 런던의 거리는 온통 진흙탕으로 변해 있었고, 잿빛으로 물든 공장 건물들은 지친 표정으로 검고 독한 매연을 뿜어 올리고 있었다. 공장에서 돌아온 네드 러드도 지친 얼굴로 일기를 펼쳤다. 희미한 램프 빛이 동그랗게 비추고, 멀리서 마차가 지나가는지 포도를 때리는 쇠 말편자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작업 시간에 입을 열 수 있는 사람은 감독관 데이먼드 씨뿐이다. 단두대 데이먼드. 채찍 같은 혀를 휘두르며 욕설과 잔소리를 늘어놓는 악당이다.
“잡담 금지! 한눈팔지 말고 일해!”
술 냄새를 풍기며 여공들의 몸에 손을 대는 데도 찍소리 한마디 하는 사람이 없다. 목이 날아갈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오늘 단두대 데이먼드 씨의 먹이가 된 사람은 클라라 아줌마였다. 암캐니 갈보니 하는 소리를 들으며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클라라 아줌마. 클라라 아줌마에게는 공장에서 일하다 불구가 된 남편 칼 씨와 돈벌이를 시키기에는 아직 어린 두 아이가 있다.
“일들 안 하고 뭘 봐. 나랑 눈이 마주치는 놈은 당장 잘라버릴 거야.”
모두 고개를 숙인 채 일을 계속했다. 클라라 아줌마에 대한 동정, 단두대 데이먼드 씨에 대한 증오, 이런 감정이 얼굴에 가득했지만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고 기계를 돌렸다.
“안녕, 네드?”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나는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마침 근처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던 단두대 데이먼드 씨와 눈이 마주쳤다.
“너도 잘리고 싶냐?”
뒤통수를 얻어맞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 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수줍은 듯 사랑스럽게 속삭이던 그 목소리는 환청이 아니었다.
“걱정할 거 없어. 내 목소리는 너에게만 들리니까.”
이름은 제니라고 했다. 내 또래의 여자아이였지만 치마를 입지도, 머리를 양 갈래로 땋지도 않았다. 제니는 특별했다. 제니는 강하고 거대했으며 힘도 나보다 훨씬 셌다. 그런 제니가 나에게 손을 내밀며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드, 우리 친구 하지 않을래?”
나도 제니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렇게 제니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이날의 기록에서 토마스 하버 박사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단두대 데이먼드 씨와 클라라 아줌마에 대한 이야기는 앞에서도 몇 번 나왔기 때문에 이미 알고 있었다. 문제는 갑자기 등장한 제니였다. ‘두려움에 질린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네드 러드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제니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부분에서 하버 박사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제니에 대해 묘사하는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내 또래의 여자아이’라는 부분과 ‘강하고 거대했으며 힘도 나보다 훨씬 셌다’라는 부분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토마스 하버 박사는 그 부분으로 돌아가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역시 모순되는 내용이었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단순한 문장의 오류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모순의 이면에는 항상 중요한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걸 토마스 하버 박사는 오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토마스 하버 박사는 1810년 4월 7일의 비 내리는 런던을 떠올렸다. 템스 강의 악취를 맡으며 도착한 양말 공장에서 열한 살짜리 소년이 기계를 돌리고 있었다. 그가 바로 일기의 주인공 네드 러드였다. 하지만 제니라는 이름의 소녀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고아원 출신의 공장 노동자 네드 러드와 그가 돌리고 있는 방적기뿐이었다…….
순간 토마스 하버 박사는 머릿속에 떠오른 어떤 생각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역사라는 괴물은 그동안 얼마나 많은 부조리를 우리에게 강요해 왔던가. 믿을 수 없는 폭력과 의미 없는 살육, 그릇된 신념과 궤도를 이탈한 이념을 사실로 만들었던가. 네드 러드의 일기 속에서도 역사라는 괴물은 그런 횡포를 부리고 있었다.
제니 하그리브스. 그녀의 아버지 제임스 하그리브스는 1764년 방적기를 발명한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770년, 특허를 딴 그는 자신이 발명한 방적기에 딸의 이름을 붙여 부르게 된다. 이른바 제니 방적기다. 네드 러드의 일기에 등장하는 소녀의 이름과 제임스 하그리브스가 발명한 방적기의 이름이 동일하다는 사실은 과연 우연의 일치에 불과할까? 토마스 하버 박사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일기의 다음 페이지를 펼쳤다. 일기의 날짜는 1810년 4월 10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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