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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5.27 10:01 수정 : 2013.05.29 09:53

강태식 소설 <6화>



제니와 함께 있으면 즐겁다. 내 안에 담겨 있던 이야기들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와 지루한 시간의 구덩이를 순식간에 메워버린다. 태어나자마자 강보에 쌓여 버려진 일, 고아원에서의 생활,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 마리아 수녀님, 그리고 조니 앤 제이콥 공장에서 겪은 일 등 대부분 우울하고 재미없는 이야기들이지만 제니는 웃는 얼굴로 내 눈을 바라보며 끝까지 들어준다. 이야기가 끝나면 다정한 목소리로 위로의 말을 해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괴로운 기억은 잊어, 네드.”

제니의 말은 마법의 주문 같다. 검은 망토가 걷히는 순간 괴롭고 아픈 기억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오늘도 나는 잊고 싶은 기억 하나를 꺼내 제니에게 내밀었다. 부잣집 도련님 척 베넷에 대한 이야기. 녀석이 준 주황색 사탕에 대해서도, 그 사탕이 보여준 오렌지 맛 환상에 대해서도 모두 이야기했다.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제니는 슬픈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아, 불쌍한 네드!”

그런 다음 이런 약속도 했다.

“너도 척처럼 될 수 있어. 내가 너를 척 베넷처럼 만들어줄게.”

“정말?”

“너는 척 베넷처럼 될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어줄 테니까.”

이번에도 제니의 말이 마법을 부릴 수 있을까? 그게 헛된 기대라는 걸,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커진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제니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나는 그런 기대에 부풀어 올랐다.

“나는 너에게 많은 것을 줄 수 있어, 네드.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말이야. 좋은 옷과 멋진 신발을 갖고 싶니? 커다란 저택에 살면서 송아지만 한 개를 기르는 건 어때? 나와 같이 있으면 이 모든 게 너의 것이 될 거야. 네가 왕자님 같은 옷을 입고 푹신한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으면, 나는 너를 위해 멋진 장난감과 해적들의 보물 지도를 준비할게. 네가 잠에서 깨면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 우리 둘이서 신나는 모험을 떠나는 거야. 상상해봐, 네드. 이 모든 게 너의 것이라고. 나는 너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어. 그러니 네드, 너의 행복을 생각하면서 나를 돌려줘.”

제니에게는 주황색 사탕도 많다고 했다.

“하나 줄까?”

그 사탕 하나를 받아 입안에 넣었다. 달콤한 오렌지 맛이 났다.

역시 제니의 정체는 방적기였다. 공장에서 열다섯 시간씩 일해야 하는 네드 러드에게 어느 날 방적기 제니가 말을 걸어온 것이다. 토마스 하버 박사는 쓴웃음을 지으며 네드 러드의 일기를 계속 읽어나갔다. 제니의 이야기로 가득 찬 일기를 보면서 토마스 하버 박사는 다시 한 번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다정하고 상냥한 제니. 때로는 누이처럼, 때로는 신부처럼 힘들고 지친 네드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제니. 네드의 일기 속에서 제니는 천사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었다. 제니와 함께 있으면 네드는 언제나 행복했다. 눈부실 만큼 아름다운 환상이 비참하고 초라한 현실을 잊게 해주었다. 제니가 들려주는 화려하고 멋지고 황홀한 이야기들. 네드는 제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상에 빠졌다. 동화 속의 주인공처럼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곤 했다. 두 달이라는 시간이 네드 러드의 일기 속에서 그렇게 흘러갔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어느새 새벽 네 시 반이었다. 잠시 현실로 돌아온 토마스 하버 박사는 기지개를 켜며 뭉친 어깨를 주물렀다. 아직도 창밖의 런던은 캄캄한 어둠 속에 숨어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차갑게 식은 커피를 버리고 포트에 물을 올렸다. 잠시 후, 티백에서 우려낸 홍차를 한 손에 든 토마스 하버 박사는 액자처럼 걸려 있는 창문 앞에 서서 어둠에 잠겨 있는 런던 시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금으로부터 약 이백 년 전의 런던. 산업혁명 이후 연일 고도의 성장을 거듭하면서 세계 경제의 메카로 군림하던 꿈의 도시. 하지만 그 그늘에는 무엇이 있었던가? 공장에서 뿜어내는 매연과 그 매연이 만든 스모그 때문에 낮게 내려앉은 하늘. 공장이라는 지옥에서 하루 종일 기계를 돌려야 했던 노동자들. 폐수로 오염된 템스 강의 악취. 거지와 창녀와 소매치기들이 우글거리던 빈민가. 밤마다 주정뱅이들의 노랫소리가 처량하게 울려 퍼지던 런던의 뒷골목. 발전이라는 이름의 광기에 사로잡힌 채 서서히 미쳐가던 런던. 그리고 그 지옥 속에서 영혼마저 빼앗긴 채 모든 걸 잃어버려야 했던 사람들……. 토마스 하버 박사는 방적기를 돌리고 있는 네드 러드의 모습을 떠올렸다. 창밖의 런던은 어느새 이백 년 전 그때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네드 러드의 일기가 스탠드 불빛을 받으며 토마스 하버 박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기 속의 날짜는 1810년 6월 21일이었다. 이빨처럼 날카로운 공장의 지붕들과 어디선가 들려오는 어린아이의 울음소리, 피로에 지친 공장 노동자들의 무표정한 얼굴이 토마스 하버 박사 주위를 순식간에 에워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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