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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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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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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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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살 이상 된 나무만 해도 무우전 옆 매화 서너 그루, 무량수각 앞에 누운 소나무, 지장전 위엔 영산홍, 자산홍 열댓 그루, 칠전차밭의 700살 넘은 차나무가 있다. 모두가 선암사의 부처님이다.
옳아, 자네 코에 지금 한창인 때죽나무 향기가 스쳤는가 보군, 아니면 작약의 아릿한 향기가 자네를 홀렸든가. 아니면 누이의 추억 같은 찔레꽃 향기를 맡았거나. 퉁방울눈을 한 할배는 다짜고짜 종잡을 수 없는 환영사를 풀어놓는다. 그 푸근한 인상과 입심으로 보아 오랫동안 주지로 있다가 모든 걸 내려놓은 그 스님 같았다.
장승 할배가 산문을 지키는 것부터 뜻밖이었다. 동구 밖에 버티고 서서 액도 막고 나쁜 손님 겁도 줄 일인데, 산문지기 구실은 드문 일이다. “궁금해? 선암사는 근엄한 부처님들의 강역이 아니라 부처와 사람이 하나인 가난한 마을이야.” 선암사엔 험상궂은 사천왕상과 사천왕문이 따로 없다. 그저 이정표처럼 나뭇가지 하나 찔러놓으면 될 일이었다.
“마을 자랑 하려니 쑥스럽긴 한데, 백 마디 설명보다 고수들의 평가 몇 마디가 더 귀에 잘 들어오겠지.” 김봉렬 교수(한국예술종합학교·건축)는 선암사를 ‘최후의 최고’라고 했고, 미술사가 유홍준 교수는 제 마음속 문화유산으로 한글·청자·산사를, 그리고 산사의 대표로 선암사를 꼽았다. 김개천 교수(국민대 조형대학)는 심검당만을 두고 ‘비움마저 비운 집’이라 하여 한국 최고 24곳 가운데 하나로 들었다.
“이 마을을 조성한 건 사람이 아니야. 사람은 자연의 길을 따랐고, 세월의 더께를 그대로 지켰을 뿐이지.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야. 그러다 보니 자연과 세월이 사람의 마을에 하나로 스며들었어.” 그러나 진입로의 널찍한 신작로가 거슬린다. 짙은 숲 그늘에 가려 있지만, 차량 두 대가 교행할 만큼 넓다. 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고, 나쁜 길은 넓은수록 좋다고 김수근 선생은 말했는데, 완전 짝패였다.
옛길이 남아 있긴 하다. 작은 승선교에서 큰 승선교로 이어지는 신작로 맞은편 오솔길이다. 50m나 될까. 작은 승선교 아치엔 큰 승선교가 담겼고, 큰 승선교 아치엔 강선루가 가득하다. 여울엔 강선루 하나 더 거꾸로 서 있고. 우리나라 풍경 달력이 가장 즐겨 담는 풍경이다. 남쪽으로 낙안읍 지나 40리쯤 가면 벌교에도 반쯤 남은 홍교가 있다. 선암사 4차 중창주 호암 스님이 큰물만 나면 떼다리(벌교)가 떠내려가 고생하는 그곳 사람들을 위해 지었다. 그 덕에 선암사 중창할 때는 마을 사람들이 힘을 보탰다. 불전과 승방·담장·수곽·골목 따위가 꼭 민초의 눈높이가 된 데는 그런 연유가 있다.
승선교에서 두 번 크게 돌고 삼인지에서 다시 한 번 돌면 선암사 일주문이다. 뒷간과 함께 정유재란, 6·25전쟁의 화마를 피한 목조건물이다. “너무 꼬치꼬치 보지 말게나. 그러다 보면 주심포가 어떻고 다포식이 어떻고, 고려 양식, 조선 후기 양식이 어떻고, 그런 알음알이나 챙기다 돌아갈 거야. 일단 마음으로 느끼기만 하시게. 마을에 동화되면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솔직히 건물 하나하나는 특별한 게 없어. 심검당 역시 한 문중 살림에 필요한 대중방, 스님 개인방, 부엌, 곳간, 창고 등을 한곳에 두다 보니 좁은 공간을 그렇게 알뜰하게 배치한 거야. 건물 구조가 1층에서 2층까지 이어진 것은 비탈진 지형에 맞추다 보니 그런 거고.”
골목길 따라 걷다 보면 여실하다. 담도 그렇고, 뒷문도 그렇고, 부엌살림도 그렇고 모두 눈높이보다 낮다. 담장 돌은 호박돌, 그 높이는 고작 가슴에 맞췄다. 원치 않아도 이웃집 대청이 들여다보이고, 귀만 기울이면 두런대는 소리 다 들린다. 흙투성이 발로 툇마루에 걸터앉아 물 한잔 청할 수 있는 마을. 가장 큰 어른 종정이 머무는 무우전 돌담이 가장 허술하고, 왕실의 원당이라는 원통각의 뒷문으로 향하는 담장은 한없이 낮게 깔렸다. 응향각과 설선당 사이 돌담, 그리고 해천당 돌담의 이끼 낀 돌은 정이 깊다.
창조자는 자연이었고, 시공은 세월이 맡았다. 자연에 안겨 저절로 늙는다는 게 저렇게도 아름답고, 욕심 없고 겸손하다는 게 저렇게 위대할 수 있구나. 맞다, 도대체 달마가 선암사 말고 갈 데가 어디 있었을까.
호암 스님이 중창할 땐 대웅전 심검당·설선당·만세루 등 대웅전 일곽이 고작이었다고 한다. 선암사 착하다는 소리가 퍼지면서 스님도 많아지고, 모셔야 할 부처님도 많아지면서 마을이 커졌다. 언젠가부터 여섯 문중이 나름의 법도와 전통에 따라 살림 사는 큰 마을이 됐지. 육방살림이라고 하는데, 각자 조실 밑에서 수행에서부터 먹고사는 것까지 다른 살림을 한다. 상월당 스님을 거쳐 해붕 스님이 중창할 때는 건물만 50여채에 이르렀다.
“그걸 어떻게 늘렸겠나. 지금 같으면 불도저로 산을 밀었겠지만, 스님들은 산과 계류가 허락하는 곳에만 한 채씩 늘렸어. 원통전 일곽(팔상전·불조전·장경각·노전)으로 확장되고, 그리고 달마전·무우전으로, 그리고 무량수각·창파당·해천당 일곽으로 늘려간 거야.” 해인사처럼 큰 절은 대개 진리의 피안으로 바다를 건너는 배의 형국을 염두에 두고 가람을 배치했지. 법화신앙 때문일까, 선암사는 지금 이곳이 극락이라는 생각에 따라 행복한 마을 만들기에 열중했다. 그러나 지적 계획이 없었다고 막개발했다고 할 순 없다. 인위를 최소화했다 뿐이지, 산과 계류의 흐름, 지세의 넓고 낮음에 충실히 따랐다. 인위와 무위가, 자연과 인간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셈이다.
그 한 징표가 사시사철 피고 지는 꽃과 향기. 열흘에 한번씩 단장을 바꾼다는 유홍준 교수의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수종만 100종이 넘는데, 한국의 정원수를 망라했다. 사람들은 그저 원통전과 무우전의 선암매나 기억하겠지만, 600살 이상 된 나무만 해도 무우전 옆 매화 서너 그루, 무량수각 앞에 누운 소나무, 지장전 위엔 영산홍, 자산홍 열댓 그루, 칠전차밭의 700살 넘은 차나무가 있다. 모두가 선암사의 부처님이다.
그 나무들이 꽃과 향을 공양하니 부처님이나 스님이나 얼마나 행복하겠어. 가장 먼저 피는 건 창매라고 일컫기도 하는 생강나무. 달콤한 향기는 매향만큼이나 코끝을 찌른다. 홍매·백매·청매가 꽃망울 터뜨리면 동백꽃 뒤따르고, 시골 처녀 볼빛 닮은 살구꽃이 질 때쯤이면 진달래·개나리가 선암사를 장엄한다. 복숭아·자두·배·사과꽃 향기 자욱하고 철쭉·자산홍·영산홍이 피고 질 때면 모란꽃 만개한다. 산기슭엔 찔레꽃, 산중엔 아까시꽃 향기가 마을을 자욱하게 덮고, 모란 지면 작약·불두화가 경내를 환하게 한다. 산딸나무·층층나무·때죽나무·배롱나무가 연등처럼 피어날 때면 연지의 연꽃, 승방 화단의 상사화가 피어 장마철 시름을 달래주고, 온갖 국화 피고 지면 서리와 함께 차꽃의 눈처럼 맑은 향이 감돈다.
“대충 돌았으니 달마전 툇마루에 앉아 4단 수곽 물소리나 듣자고. 너도나도 최고의 조형물이라고 칭송하지만, 사실 부자재나 수공을 보면 아무것도 아니야. 차 뿌리를 거쳐 흘러온 물을 선방 납자들이 마시고 득도하라고, 모난 돌 둥근 돌에 홈 파고 대나무로 연결해 앞마당까지 끌어온 것뿐이지.” 정성이 90%다. “하나만 묻겠네. 달마가 동쪽으로 온 까닭은? 이따 뒷간을 돌아 나갈 때까지 한 수 가르쳐주시게나.”
달마전과 원통전 사이 아주 은밀한 뒷문을 거쳐 순조의 원당이었다는 장경각 앞에서 마을을 일별한다. 산신각 뒤란에서 무량수각 후원 비구니 스님 공부하는 것 잠시 훔쳐보고, 청파당 앞 멋진 수곽에서 물 한 잔 마시고 돌아서면, 김수근 선생이 ‘대한민국 최고’라고 했던 뒷간이 떡하니 막아선다. 눈과 귀와 마음을 씻어냈으니, 이제 뱃속까지 씻어내라는 걸까. 버리고 또 버리니 이 얼마나 큰 기쁨인가, 입측오주 한 구절 중얼거리며 묵은 것을 내어놓는다. 그런데 달마가 온 뜻이 뭐람?
뱃속을 비우고 산문을 나설 때쯤 이런 생각 절로 든다. 창조자는 자연이었고, 시공은 세월이 맡았다. 자연에 안겨 저절로 늙는다는 게 저렇게도 아름답고, 욕심 없고 겸손하다는 게 저렇게 위대할 수 있구나. 맞다, 도대체 달마가 선암사 말고 갈 데가 어디 있었을까.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추신. 선암사에서 멀지 않은 순천 오천동에서 국제정원박람회가 열리고 있다. 개장 26일 만에 100만명이 다녀갔다고 주최쪽은 신이 났다. 그러나 아쉬움이 많다. 정원은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의 공간. 어려움이 있긴 했겠지만 정원 형태만 달랑 옮겨왔기에 거기엔 사람도 자연도 온데간데없다. 메마른 인위뿐. 그러다 보니 그곳은 쉬고 치유하는 곳이 아니라 강행군하는 곳이 되었다. 피로만 쌓아 가면 어찌할거나.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마지막 코스에 선암사를 슬그머니 얹어놓는 거다. 그 신들의 은밀한 비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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