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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6.18 19:31 수정 : 2013.06.18 21:14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곽병찬 대기자
시인 박기동과 작곡가 안성현의 누이도 온다 간다는 말도 못하고 그렇게 갔다. 1947년 박영애는 벌교에서 스물넷에, 안순자는 광주에서 15살에 세상을 떴다.

시인 김소월이 자란 곳은 평안북도 정주의 바닷가 마을이었으니, ‘뒤뜰 밖 갈잎의 노래’는 온전한 꿈이었을 것이다. 소월도 가고 꿈도 갔지만, 시 ‘엄마야 누나야’는 북의 정주를 떠나 남의 나주 남평 지석강에서야 꿈꾸던 터를 잡을 수 있었다. 지석강이 키운 안성현을 만나 노래가 되었고, 금모래와 갈잎의 노래에 둘러싸인 노래비로 남았다. 박기동 시인의 ‘부용산’이 이 땅의 누이를 위한 불멸의 애가(哀歌)로 남게 된 것도 그곳 안성현과의 만남을 통해서였다.

화순군 이양면 왕피나무골에서 발원한 화순천은 능주 적벽을 거쳐 남평 들로 접어들면, 나주호에서 흘러나온 대초천이 기다렸다는 듯 합수하여, 지석강이란 이름을 얻는다. 물색이 얼마나 맑고 고왔으면, 물길이 감싸안은 들엔 쪽돌이란 마을이 들어섰다. 늘 푸른 숲과 눈부신 모래밭 그리고 쪽빛 물은 그곳 사람들의 결 고운 서정을 잉태했고, 애틋한 연민을 자양분 삼은 시와 노래를 출산했다. 하지만 지석강은 지명일 뿐 사람들은 오로지 드들강이라 하니, 솔밭 입구엔 그 연원을 새긴 장대한 비석이 이정표를 대신한다. 그만큼 남은 이들의 마음 빚이 컸다는 뜻이리라.

겁도 없지, 비석은 전설의 연원을 고려 말이었다고 시기를 명시했다. 남도 제일의 고을이던 나주 남평 사람들은 식수와 농업용수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수심 깊은 곳에 보를 쌓았다. 그러나 웬만한 홍수에도 보는 터졌고, 범람한 물은 오히려 농경지를 쓸어버렸고, 해마다 불행은 되풀이됐다. 대개의 전설이 그러하듯 그때 현인이 나타나, 예의 그 희생공희를 권한다. 제물은 물론 정결하고 아름답고 효성스런 처녀다.

그건 드들강에만 특별한 것은 아니다. 김제 벽골제엔 단야가 있다. 스스로 제물이 되어, 사랑하는 연인의 행복을 지키고, 제방과 마을의 안녕을 지켰다는 낭자의 전설이다. 제주도엔 김녕 뱀굴 전설도 있다. 세상의 남정네는 문제만 생기면 누이의 희생에 기대어 저의 안녕을 꾀했던 셈이다. 우리나라만의 일도 아니다. 지난 5월29일이 초연 후 꼭 100년째라던 스트라빈스키 작곡, 니진스키 안무의 ‘봄의 제전’도 그런 내용이다. 아름답고 정결한 처녀는 봄의 생명력을 깨우기 위해 희생된다. 세상의 오라비들은 참으로 비겁했다!

말이 자청이지, 어느 누가 수장을 원할까. 하지만 전설의 공식대로, 효성스런 처녀 드들은 희생을 ‘자청’했다. 명주실 반 타래나 빠진다는 그 시퍼런 물속에 드들을 수장시킨 뒤 쌓아올린 보는 어떤 홍수도 이겨내며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희생을 기려 드들강이 되었고, 송림 맞은편 산은 드들매가 되었다. 그건 남정네들의 누이에 대한 최소한의 속죄의 표시였다.

드들처럼 공공의 안녕을 위해 희생된 것만도 아니다. 가난했던 시절, 그나마 한 줌 먹거리는 오라비 차지였고, 누이들은 언제나 병약했다. 누이란 이름이 애잔하고 슬프고 가냘픈 이미지로 다가오는 건 그런 까닭이었다. 그렇게 간 누이를 기리는 시와 노래의 원조가 신라 때 월명사의 제망매가. “죽고 사는 길은/ 여기 있으매 두려워하고/ 나는 간다는 말도/ 못다 하고 가느냐/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여기저기 떨어지는 잎처럼/ 한 가지에 나고/ 가는 곳을 모르겠구나…”(양주동 주석)

사무치는 노랫말과 애잔한 선율은 해방 정국 신산한 삶에 쫓기던 이들의 마음을 금세 사로잡았다. 그해 10월 여순 사건이 발생하고, 산으로 쫓겨난 이들이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는 노래가 되었다.

시인 박기동과 작곡가 안성현의 누이도 온다 간다는 말도 못하고 그렇게 갔다. 1947년 박영애는 벌교에서 스물넷에, 안순자는 광주에서 15살에 세상을 떴다. 박기동은 벌교 읍내에서 오 리 길, 부용산에 누이를 묻고는 돌아와 이런 제문을 남겼다. “부용산 오 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안성현 역시 같은 해 누이의 죽음을 가슴에 묻었다. 가야금 명인이던 부친(안기옥)이 북으로 떠난 뒤 그가 보살폈던 어린 누이였으니 상심은 깊고도 깊었다. 그가 일본 동방음악원으로 유학 갔을 때나, 돌아와 교편을 잡아 이리저리 옮겨다닐 때나 누이는 그저 오라비를 그리워했다.

안성현이 목포 항도여중(지금의 목포여고) 음악교사로 부임한 것은 1947년, 박기동이 순천사범에서 항도여중으로 옮긴 것은 1948년 2월이었다. 가슴에 상처를 안고 있던 작곡가와 시인의 만남은 운명이었다. 그리고 아끼고 아꼈던 제자 김정희가 누이처럼 폐결핵으로 요절하면서, 시 부용산이 안성현의 송(頌)을 얻어 노래 ‘부용산’으로 탄생했다. 그것은 필연이었다.

당시 항도여중은 “이처럼 내면이 아름답고 희망에 찬 학교가 어디 있을까”라고 박기동이 찬탄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경찰의 주목을 받던 두 사람은 1949년 가을 차례로 학교를 떠나야 했다. 두 사람이 이후 밟은 기구한 인생처럼 부용산의 곡절 또한 기구했다. 부용산은 1948년 4월11일 목포 평화극장에서 열린 학예회 때 5학년생 배금순의 노래로 처음 발표됐다(안성현기념사업추진위원회 자료집). 그리고 8월7일 발간된 안성현의 두번째 작곡집에 실렸다. 사무치는 노랫말과 애잔한 선율은 해방 정국 신산한 삶에 쫓기던 이들의 마음을 금세 사로잡았다. 그렇게 입에서 입으로 퍼져가던 그해 10월 여순 사건이 발생하고, 산으로 쫓겨난 이들이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는 노래가 되었다. 그 후 부용산은 빨치산 노래로 붉은 밑줄이 그어져 안성현·박기동까지 연좌되기에 이른다. 6·25 이후 안성현이 북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부용산의 봉인은 더 치밀해졌다. 그 봉인을 처음 푼 것은 안치환. 1997년 낸 앨범 <노스탤지어>에 ‘부용산’을 작가 미상의 구전가요로 올렸다.

박기동은 늘 정보기관의 감시를 받아야 했고, 툭하면 가택수색, 연행 혹은 구금을 당했다. 애지중지하던 시작 노트는 이 과정에서 모두 빼앗겼다. 76살 나이에 호주로 이민을 갔던 것은 숨 한번 편하게 쉬자는 생각에서였다. 부용산 말고 순천사범학교 재직 중 남조선교육자협회 성명서에 서명한 것도 족쇄처럼 따랐는데, 내용이란 게 고작 “우리의 권익은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신생 한국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구전가요’ 부용산은 1997년 안치환에 의해 세상에 그 존재를 알린 뒤, 이동원·한영애 등 우리의 가객들에 의해 원곡도 발굴되고 그 선율이 소개됐다. 이제 벌교 부용산엔 시비와 부용정이, 항도여중엔 노래비가 그리고 목포와 남평에선 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2009년엔 장안의 내로라하는 자유인들이 서울 운현동 뒷골목 ‘낭만’에 모여 ‘부용산 잘 부르기 대회’를 열기도 했고, 대회를 위해 김학민씨가 부용산의 사연을 조사해 발표하고, <한겨레> 노형석 기자는 그 자리를 세밀화 그리듯 묘사해 독자에게 전했다. 아직 봉인이 덜 풀렸는지 노래방 노래집에 그 이름 오르지 않고, 방송이 이를 꺼린다 해도, ‘부용산’은 금기에선 벗어났다.

그럼에도 오늘 다시 그 내력을 지면에 올린 까닭은 오로지 ‘우리 안의 윤창중’ 덕이다. 누이들의 희생에 기대는 것도 모자라, 식(食)과 롱(弄)의 목록에 올려 시도 때도 없이 껄떡대는 그 욕정과 탐욕이 한없이 부끄럽고 두려운 것이다. 비겁한 남정네여 부용산을 노래하게나. 드들강변이나 부용산 부용정이 아니어도 좋으니, 누이들의 애잔한 향기를 기억하시게.

(덧붙임)

안성현기념사업추진회(위원장 박종주)의 활동을 통해 몇 가지 사실이 추가로 확인됐다. 안성현은 1950년 9월15일 목포에서 공연한 무용가 안성희(최승희의 딸)를 만나, 부친과 최씨를 만나볼 셈으로 안성희의 북행에 동행했다. 사흘 뒤 인천상륙작전 및 서울 수복과 함께 전선이 교착되면서 졸지에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효자가 어머니와 처자식을 방기할 리 없었다.(부인 성동월씨) 안성현은 순흥 안씨, 최승희의 남편 안막은 죽산 안씨로, 조카 삼촌 사이가 아니다. 그의 북행과 안막은 무관하다. ‘부용산’ 탄생에 제자 김정희의 요절이 작용은 했지만, 실은 누이의 죽음이 더 큰 계기였다.(성동월씨) 그러나 이런저런 논란을 떠나, 변함없는 사실은 부용산이 이 땅의 누이들을 위한 애가라는 것이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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