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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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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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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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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5월부터 9월까지 짧은 기간이었지만, 동주의 유일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시)>를 잉태하고 숙성시킨 곳이다. 그가 일경의 감시를 피해 이사 간 북아현동 하숙집에서 그해 말 완성한 수기 시집에 수록된 19편 가운데 6편이 그곳에서 탄생했다
심부름이라고 푸념할 일이 아니다. 당대 최고의 시인 묵객들에게 초대의 글도 전하고 행사장까지 모시는 일이니 얼마나 큰 영광인가. 언제 발치에서라도 볼 수 있을까. 근자에 출간된 <오래된 서울>(지은이 최종현 김창희)에 약도와 내력이 상세하니 한걸음에 꿸 수도 있다. 재상들도 영광으로 여겼다는 백전의 품평에 모시는 것이니 그분들 또한 내심 얼마나 반기랴.
경복궁역 버스정류장 근처인 이상의 집(통인동 154번지)이 출발점이다. 떼로 모이는 것엔 질색하는 ‘모던 보이’라지만, 동주의 이름으로 하는 행사이니 열 일 제치고 나설 것이다. 그다음은 필운동의 구본웅. ‘조선의 로트레크’로 비교되는 천재 화가. 구본웅은 세상과 불화했던 이상에게서 비운의 천재를 알아보고 그림으로 그를 남겼고, 이상은 꼽추 구본웅의 찌그러진 가슴에서 타오르는 열정을 보고 시로 남긴, 서로 평생 반려였다.
가는 길 누하동엔 노천명 시인(225-1)도 있다. 일찍이 알려진 문재 때문에 일제 말 친일 시를 남기게 돼 인생이 한번 구겨지고, 6·25전쟁 때 피난 가지 못했다가 문우의 강권으로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했다가 평생 부역자로 낙인찍혀 또다시 구겨진 인생. 누하동 집은 이후 자신을 가둔 감옥이었다. 그런 그가 꿈꾸던 것은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는 그런 ‘이름 없는 여인’이었다. 기구한 역사는 그런 여인을 가만두지 않았다. 마음 여리고 결이 곱기로는 동주와 같은 반열이니, 살아간 길이 다르더라도 서로를 알아볼 것이다. 노천명에게 부탁하면, 이화여전 동창인 김수임(옥인동 19번지)과 옥인동 92번지가 원적인 엘리스 현에게도 기별이 닿을 것이다. 역사의 풍랑 속에서 원통하게 스러져간 여인들!
구본웅 가에서 이중섭 하숙집은 지척. 1954년 7월 이곳으로 와 이듬해 예정된, 처음이자 마지막 서울 전시회에 출품할 작품 대부분을 이곳에서 제작했다. 새벽마다 수성동 계곡으로 올라가 차가운 계류로 몸을 씻었다. 하루 세 번 먹는 식사 시간도 아까워 아침에 밥 두 그릇을 해치우는 것으로 세 끼를 대신했다. 오로지 가족과 합치기 위해 전시회에 모든 걸 걸었다. 전시회는 호평을 받았지만, 돈도 떼이고 마음의 상처만 남긴 채 가족이 있는 일본행 꿈은 좌절됐다. 이듬해 그는 세상을 떴다.
그런 그에게도 부탁 하나 하자. 구본웅이 로트레크에 비교된다면, ‘한국의 들라크루아’로 비교되는 이쾌대에게 기별하는 것이다. 선전 따위 일제가 주도하던 관변 전시를 거부하고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해 활동했던, 견결하기 태산 같았던 화가. 이중섭도 그와 활동을 함께 했다. 그의 형 이여성은 청전 이상범과 함께 손기정 선수 일장기 말살 사건을 주도했으니 그 형에 그 동생이다.
동주의 하숙집도 지척이다. 옥인동 9번지, 직선거리로 100미터나 될까. 1941년 5월부터 9월까지 짧은 기간이었지만, 동주의 유일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시)>를 잉태하고 숙성시킨 곳이다. 그가 일경의 감시를 피해 이사 간 북아현동 하숙집에서 그해 말 완성한 수기 시집에 수록된 19편 가운데 6편이 그곳에서 탄생했다. 동주는 일제의 사찰과 탄압 때문에 한정본 출판은 포기하고 수기본 3부를 남겼지만, 두 부는 사라졌고, 벗 정병욱에게 맡긴 것만 남았다. 정병욱은 학병으로 끌려가면서 어머니에게 보관을 신신당부했고, 모친은 전남 광양 술도가의 한 항아리에 숨겨 일경의 눈도 피하고, 습기와 벌레로부터 원본도 보호할 수 있었다. 용정과 평양, 다시 용정, 서울, 도쿄, 후쿠오카 등 젊은 시절 그 멀고 먼 행로 속에서 그가 꾸었던 맑고 곱고 높은 꿈은 그래서 후대에 전할 수 있었다.
산기슭 숲속에 하늘, 바람, 별, 시 그리고 패 경 옥 그리고 사랑 동경 쓸쓸함 그리고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따위의 이름을 단주막과 카페와 쉼터가 들어서고, 대청마루는 시사 동인들이 지킨다. 촌장으로는 고은 혹은 신경림 선생 같은 분을 모신다면…
수성동 계곡을 넘으면 옥계, 청계로 이어진다. 조선 영정조 문예르네상스의 태반과도 같았던 곳. 조선 산수의 진경에 문인 정신의 진수까지 담아낸 겸재의 진경산수 탄생지이고, 조선 후기 문예운동을 견인했던 옥계시사(송석원시사)의 발상지다. 그들이 조직한 백일장이 송석원시사 백전. 훗날 백전은 서촌을 넘고 한양을 넘어 전국에서 문망을 꿈꾸는 이들의 제전이 되었으니, 당대의 경화사족 추사 김정희도 바위 각자(刻字) ‘송석원’을 헌정한다.
송석원 지나 세심대 넘으면 청풍계 구역. 지금의 청운동, 궁정동에 해당한다. 송강이 그곳에서 나서 자랐고, 일제병탄기 시대의 사표가 됐던 우당 이회영 선생과 동농 김가진 선생이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떠나기 전까지 살던 곳이다. 우당 선생은 이상재 선생이 헌정한 ‘백세청풍’ 각자로 남았지만, 동농 선생은 유해 송환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세거지에 백운장 각자만으로 남았다. 그곳에서 행사장인 동주시원(東柱詩原)까지는 5분 거리, 왼편의 인왕산과 오른편의 북악산 사이 자하문 고개 왼쪽 둔덕이다.
그러면 어른들을 어떻게 모신담? 수성동·옥류동 계곡 건너고 세심대 넘고, 다시 청풍계 건너 고갯마루까지 가야 하니 노구에 만만한 여정이 아니다. 그러나 걱정할 일 없다. 이중섭 화백이 누상동에서 <길 떠나는 가족>을 위해 제작한 달구지가 있으니 말이다. 남정네는 고삐 잡고 희희낙락 덩실덩실 춤추고, 소도 덩달아 히힝 노래하고, 큰놈은 수레 앞에서 꽃잎 뿌리고, 작은놈은 뒤에서 비둘기 날리고, 아내 얼굴에 꽃이 활짝 피어 있는 그 <길 떠나는 가족> 속 달구지 말이다. 그걸로 어찌 산과 계곡을 넘느냐고? 걱정도 많지, 그건 꽃잎보다 가벼워 바람 타고 훨훨 날아간다네….
서울엔 크고 작은 산들 덕에 고개도 많고 물길도 즐비했다. 고개만 해도 230여개에 이른다고 하니, 콘크리트로 채워지기 전 한양은 산과 계곡을 씨줄 날줄 삼고, 고개와 계류를 금실 은실로 삼아 짠 아름다운 비단 같았을 것이다. 이 가운데 풍광과 사연에서 손에 꼽히는 것이 바로 자하문 고개. 혹자는 그곳을 유럽의 알프스에 비교하기도 한다. 고개 옆 시인의 언덕에 서면, 앞으로는 한양 도성이 한눈에 들어오고, 남산, 한강, 관악산, 청계산으로 이어지는 자연의 파노라마가 장엄하다. 돌아서면 한양의 진산 삼각산에서 경주마처럼 내달리는 연봉들이 보현·문수봉에서 우뚝 멈춰 숨을 한번 고르고, 다시 비봉과 형제봉 능선으로 나뉘어 질주한다. 한쪽 무리는 인왕산에서, 다른 쪽 무리는 북악산에서 다시 멈춘다. 자하현은 두 봉우리를 잇는 노루목으로 양손에 고삐를 쥐고 행마를 조절하는 곳이다. 2천여년 전 예수가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고하며 “네가 오늘 평화를 알았다면…”이라고 피눈물 흘리던 겟세마네 동산이 떠오르기도 하고, 알프스의 몽블랑 서벽과 마주하고 있다는 몽탕베르 언덕이 떠오른다.
그것을 어찌 짧은 필설로 표현할 수 있을까. 겸재의 인왕제색도도 그 파노라마의 한 국면만을 잡은 것이요, 이인문의 송석원시사 연회도는 얼개만 추렸다. 자하문 너머 부암동 별서에서 안평대군이 꾸었던 꿈속의 몽유도원(안견의 몽유도원도)이 그랬을까.
“이번 정거장은 부암동사무소, 다음은 윤동주 시인의 언덕(혹은 윤동주 문학관)….” 고개를 넘을 때마다 가슴 설레게 하는 안내 방송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아름다운 이름의 언덕이 있었구나. 공무원 나리들이 어떻게 저런 발상을 했지? 그런 설렘이 오늘은 동주시원에서 부활하는 송석원시사 백전의 꿈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꿈이 멋지면 현실의 아쉬움은 더 깊어지는 법. 풍광도 최고요 작명도 멋지지만, 고작 조성한 것은 흔한 둘레길 하나, 거친 등산화나 밟고 지나간다. 사람이 모이고, 노래가 섞이고 인연이 맺어져야, 희로애락이 이야기도 되고 시도 되고, 신화와 전설로도 익어 가는데, 시인 묵객의 꿈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꿈 하나 더 얹어본다. 산기슭 숲속에 하늘, 바람, 별, 시 그리고 패 경 옥 그리고 사랑 동경 쓸쓸함 그리고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따위의 이름을 단 주막과 카페와 쉼터가 들어서고, 대청마루는 시사 동인들이 지킨다. 촌장으로는 고은 혹은 신경림 선생 같은 분을 모신다면, 도대체 저 시인의 언덕이 어떤 별을 향해 날아갈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언덕 한중간에 문학도서관을 지은들, 시인 묵객은 없고 등산객만 오간다면 그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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