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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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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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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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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이들의 아픔을 알까, 고통을 그리고 절망을 알까. 누가 감히 이들 앞에서 역사에 대하여, 민족과 국가에 대하여, 말을 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는 다만 그들 앞에서 죄인일 뿐.”
15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대구에서 한 모임의 뒤풀이, 막걸리 잔이 제법 오가고 나서야 문득 흰 바탕에 보라색 꽃을 그려넣은 동그란 배지가 여럿 눈에 띄었다. 대학 재학생이거나 갓 졸업한 이들이었다. 대구 중심을 가로지르는 신천의 한 둔치에 2차를 벌여놓고야, 철 지난 배지를 단 까닭을 물었다. 그들은 대구경북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회원들이었다. 배지는 일본의 한 시민단체에서 할머니들 후원금 마련을 위해 팔고 있는 것이며, 도라지꽃은 할머니들의 상징이라고 했다. 흐르는 어둔 강물결에 불빛은 어지럽게 흩어지고, 나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나는 할머니들에 대해 그동안 건조한 글로만 이해하고, 추상적인 숫자로만 따지고, 자료가 되어버린 사진과 서류로만 알려고 들었다. 굳이 그 상처를 만져봐야 아는가, 오열이 굳어버린 그 쉰 목소리를 들어야 느끼고, 그 깊은 주름살에서 고통의 깊이를 확인해야 알 수 있는가? 이렇게 따져 묻긴 했지만, 실은 두려웠다. 살아있는, 저 뜨겁고 고통스런 진실에 상처 입고 델까 봐 가까이 가는 것을 피했던 것이다.
2천년 동안 수많은 이들을 죄의식에 잡아둔 예수의 십자가 수난. 그러나 그것도 시간만 따진다면 한나절이었다. 빌라도의 선고를 받고부터는 기껏해야 사나흘이었다. 그러나 할머니들의 고통은 하루도 아니고 이틀도 아니고, 서른 삼백 천수백의 길고 긴 날들이었다. 그들의 가슴에 찍힌 낙인 자국은 평생 수치스런 기억의 감옥 속에 그들을 가둬두기도 했다. 그러니 그들의 고통을 어느 누구와 비교할 수 있을 것인가. 가까이만 있어도 그 상처의 고통, 기억의 악몽, 가혹한 운명에 대한 원망에 감염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그 죄의식과 부채감은 어찌하라고.
그저 구김살 없이 세상을 맑게 보고, 바르게 비치는 선한 마음의 친구들, 그런 그들에게 나는 염치도 없이 배지에 대한 욕심을 드러냈다. 흔쾌히 건네는 누군가의 배지를 냉큼 그의 마음까지 챙겨 갖고 돌아왔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할머니들의 수요집회에도 가고,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눔의집만은 멀찌감치 두었다. 팔당호반, 호수와 숲이 맞닿은 실금을 따라 이어진 꿈속 같은 길, 경기도 광주 퇴촌의 언제나 반쯤 잠든 사람과 마을, 그리고 무성한 갈대와 연 등으로 일렁이는 경안천 습지…, 그 아름다운 풍광 속을 몇 번씩이나 오갔지만 원당리 무갑산 가새골 입구에 이르러서는 번번이 고개를 돌린 채 초월읍 서하리 쪽으로 냅다 속도를 내는 것이었다.
7월 어느 날, 비로소 역사관 입구에 섰을 때 나를 주저하게 했던 이유가 거기에 말이 되고 조각이 되어 서 있었음을 알았다. 입구 쪽 벽에 설치된 <누가 이들에게>를 두고, 작가(임옥상)는 이렇게 말했다. “누가 이들의 아픔을 알까, 고통을 그리고 절망을 알까. 누가 감히 이들 앞에서 역사에 대하여, 민족과 국가에 대하여 말을 할 수 있을까, 우리 모두는 다만 그들 앞에서 죄인일 뿐.” 피카소는 스케치 <강간>에서 육체만이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오장육부에서 사지까지, 영혼과 세포 하나까지 유린하고 난자하는 것을 그렸다. <누가 이들에게>에선 착검한 소총 다섯 자루가 여인의 가슴에서 정수리까지 관통하고 있었다. 손은 잘렸고, 새는 추락하고 있었다.
가만, 그런 짓을 저지른 게 어디 일제만일까. 김순덕 할머니, 문필기 할머니, 이옥선 할머니, 배초희 할머니, 박옥선 할머니…, 그분들을 성노예로 넘긴 것은 이 땅의 남정네들이었다. 집안 빚을 갚는다며 딸을 기생으로 팔아넘기고, 그 딸이 빚을 갚고 돌아오자 다시 위안소로 팔아넘긴 아비도 있었다. 관동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는 청구권 자금 몇 푼 얻어 쓰기 위해 할머니들의 난자당한 인생과 피눈물을 몰래 팔아먹었다. 일본은 지금도 그걸 빌미로 배상을 거부한다. 그의 졸개들은 일제 때 할머니들을 능욕했던 바로 그자들을 기생관광단으로 불러들여 또다시 누이들을 성노리개로 넘겼다. 그걸 두고 당시 국무총리란 자가 이화여대생 앞에서 히죽거리며 한다는 소리가 ‘달러를 벌어들이는 게 애국이야’였다.
도라지꽃. 꽃말은 영원한 사랑. 피기도 전에 모가지째 꺾였으니 아직 순정한 소녀 그대로인 꽃. 소녀는 그 맑고 깊은 눈으로 영원한 사랑을 꿈꾼다.
할머니들이 그 치욕의 기억을 공개하고 전세계가 공분했음에도, 그들은 더 뻔뻔하게 나댔다. 특히 아비에 이어 딸에게까지 충성하는 자들은 ‘전쟁 때는 다 있는 것 아닌가’ ‘그 사람들 돈 벌려고 몸 판 것 아냐?’ ‘돈 몇 푼 더 챙기려고 가짜 위안부 짓 노릇이나 하고…’ 따위의 저주를 퍼부었다. 맞다, 그런 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만도, 우리는 죄인이었다. 죄인….
차라리 ‘트로이의 여인’(에우리피데스의 비극)들은 행복했다. 전쟁에 져 전리품으로 끌려간 여인들, 오디세우스의 종이 된 왕비 헤카베, 강간당한 뒤 아가멤논의 시녀로 끌려간 공주 카산드라, 아킬레우스의 하녀가 된 공주 프리크세네, 어린 아들은 죽임을 당하고 자신은 원수의 아들에게 성노예로 끌려간 안드로마케. 그러나 그들은 자살하거나 제물로 희생되거나 미쳐 버렸다. 운명은 더 이상 그들을 고통 속에 가둬둘 수 없었다.
환향녀라고 있었지. 청나라에 끌려갔던 50만여 조선의 여인들, 온갖 수치와 모욕을 이겨내고 꿈에도 그리던 고향 땅으로 돌아오지만 그들에게 찍힌 낙인은 화냥년! 선양(심양), 훈춘(혼춘), 지안(집안), 투먼(도문), 싱가포르, 랑군, 오키나와 등 천지사방에 일본군 성노예로 끌려다니던 여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해방은 됐어도 그들 대부분은 낙인이 두려워 만리 객지를 떠돌다 주인 없는 고혼이 되었다. 몇몇 돌아온 이들은, 누구는 혀를 깨물고 죽었고, 누구는 원수를 부둥켜안고 강물에 뛰어들었고 따위의 조작된 신화에 고문을 당해야 했다. 그건 저들을 팔아먹은 자들이 저의 죄과를 감추기 위해 지어낸 것들이었다.
그때도 7월이었다. 일본은 만주를 집어삼킨 뒤 루거우차오(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국의 중심인 베이징(북경)과 톈진(천진) 등 화북지역에 대한 침략의 손길을 뻗쳤다. 러시아가 참전하면서 전선은 헤이룽장(흑룡강)성 북쪽으로 확대됐다. 1941년 관동군은 24만명에서 75만명으로 대폭 증강됐다. 그해 7월 관동군 사령부는 조선 총독부에 도라지꽃 3만포기를 주문했다. 7월은 반도의 산과 들에 도라지꽃이 지천으로 피어나는 계절. 그러나 관동군이 요구한 것은 산천의 도라지가 아니라 저들의 성노예로 삼을, 때 묻지 않은 이 땅의 여성들이었다. 그해 1만여명의 처녀가 징발당했다. 민중과 애환을 같이해왔던 도라지꽃은, 그리하여 일본군 성노예의 은어가 되었다.
장대비 뒤끝이어서인지, 나눔의집은 고즈넉했다. 하긴 학생들이 자원봉사 시간을 채우기 위해 왔다가 떠나는 주말을 제외하곤 사람 소리가 날 까닭이 없는 곳이다. 박물관과 생활시설을 꼼꼼히 챙기는 것은 오히려 일본인 단체인데, 연간 2천여명이라고 하니 웬만해선 마주치기도 어렵다. 나와 같은 한국인 남자는 씨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평소 나눔의집은 적막강산! 그곳의 적막을 더욱 깊게 한 것은 두 팔로 감싸 안은 무갑산 가새골의 뻐꾸기 울음이었다. 보리 이삭 팰 때도 한참 지났으니 이미 남의 둥지에 탁란을 했을 텐데, 저렇게 혼자 울고 있는 걸 보면 그놈은 필경 짝을 찾지 못했거나 짝을 잃었거나 아니면 짝을 기다리는 것이 분명했다. 끝끝내 기다리다가 돌아가신 지돌이 할머니처럼.
할머니는 징용당해 끌려가면서 “반드시 살아서 올 테니 기다려 달라”던 신랑을 한평생 기다렸다. 먹고살 일이 막막하던 중 꼬임에 만주의 위안소로 팔려갔고, 하루에도 수십 번이나 자살을 생각했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리라는 신랑의 목소리에 이를 악다물었다. 그러나 해방과 함께 몸은 풀려났지만, 아… 무슨 염치로 찾아나설까. 할머니는 치매가 들고서야 가슴에 담아두었던 사연을 꺼냈고, 치매가 깊어질수록 더 자주 입에 올렸다. ‘신랑이 돌아온다고 했어. 꼭 돌아온다고 했지. 잘생긴 우리 신랑.’ 그렇게 기다리던 할머니는 5년 전 떠났다. 그곳엔 그 멋진 신랑이 계셨을까?
도라지꽃, 꽃말은 영원한 사랑. 할머니들에겐 영원한 기다림이었지만, 할머니들의 사랑은 영원했다. 김순덕 할머니의 그림 ‘못다 핀 꽃’은 그 염원의 상징이 되었다. 피기도 전에 모가지째 꺾였으니 아직 순정한 소녀 그대로인 꽃. 소녀는 그 맑고 깊은 눈으로 영원한 사랑을 꿈꾼다. 하지만 끝도 밑도 모를 영원한 기다림.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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