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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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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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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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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엔 이미 통기타로 상징되는 청년문화의 신화가 되었던 사람, 1980년대엔 노래운동의 신화가 되었고, 1990년대부턴 소극장 뮤지컬의 신화를 쌓아올렸다. 전인권과 들국화, 안치환, 권진원, 노영심, 윤도현, 나윤선 등도 그 울타리 안에서 노래의 씨를 퍼트렸고.
대학로 12길 오래된 건물 벽에 브론즈 부조가 걸려 있다. “…영원한 가객 김광석, 그가 1995년 8월11일 콘서트 1000회를 맞은 이곳에, 그의 노래를 기리며 여기에 그 흔적을 남깁니다.” 망외의 선물 앞에 선 이들의 얼굴엔 기쁨과 숙연함이 교차한다.
잠시 후 노래비 속 ‘이곳’이 가리키는 ‘학전블루’의 작은 간판을 보고는 발길을 뗀다. 부조 가까운 곳에서 한 사내가 담배를 피우고 있다. 방금 물꼬에서 나온 농사꾼 행색이다. 그 사내의 모습이 눈에 걸렸나 보다. 몇 걸음 가다가 돌아본다. 도리질 두어번 하고는 다시 걷는다. ‘그 사람 맞아? 설마…, 아닐 거야.’
하지만 맞다. 그는 김민기다. 1970년대엔 이미 통기타로 상징되는 청년문화의 신화가 되었던 사람, 1980년대엔 노래운동의 신화가 되었고, 1990년대부턴 소극장 뮤지컬의 신화를 쌓아올렸다. 동판 속의 김광석도 그의 소극장 안에서 전설이 되었지. 전인권과 들국화, 안치환, 권진원, 노영심, 윤도현, 나윤선 등도 그 울타리 안에서 노래의 씨를 퍼트렸고.
그러나 김민기는 이제 신화의 그림자일 뿐이다. 사람들은 오래전 침전된 앙금을 김민기라 여기고, 현실의 김민기는 허구로 본다. 연출가 주철환씨가 농담 삼아 ‘형님, 너무 오래 산 거 아냐’고 물었던 건 그런 까닭이다. 지난 19일 청주의 음악인들은 ‘콘서트 생각 2013 김민기’를 열었다. “김민기의 노래를 듣고 부르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을까?” “김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전화를 걸어 물어봐도 될 일을…, 그렇게 까치발 하고 그를 찾는다. 김민기는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노래의 밭을 가꾸고 있다.
양희은씨는 처음 봤을 때 그런 그를 알아봤다. 그래서 지어준 별명이 ‘석구’, 구석을 뒤집은 말이다. 그는 한사코 빛나는 무대가 아니라, 무대를 빛나게 하는 자리, 구석에 있었다. 양희은이 부를 노래를 짓고, 그의 노래에 맞춰 기타 반주를 하고, 음반을 낼 땐 프로듀싱을 했다. 쟁이들 사이에 호칭되는 ‘뒷것’, 그는 자신을 그렇게 부른다. 강요된 것이긴 했지만, 심지어 제 노래 혹은 제 음반에조차 제 이름을 달 수도 없는 아주 긴 시절도 있었다.
그렇게 그는 언제나 사람들 속, 한 귀퉁이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이야기가 노래가 되고 극이 되었다. 늙은 퇴역 하사관을 위해 지은 ‘늙은 군인의 노래’, 공장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 축가로 지은 ‘상록수’, 탄광 생활 속에서 나온 노래극 <아빠 얼굴 예쁘네요>…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물의 천성이라면, 그의 운명은 삶의 바닥으로 흘러 스미는 것. 그래서 공장으로 농촌으로 탄광으로도 떠났다. 운동의 열정 때문이 아니라, 낮은 곳에서 더 낮은 곳으로 흘러갔을 뿐이다. 세상이 가파르고 엎치락뒤치락인데 물이 어찌 유유자적할 수 있을까. 벗 이도성을 도와 야학을 세우고, 도시산업선교회(도산)에서 현장 활동을 하고, 채희완 임진택 이종구 등 문화운동 1세대들과 마당극(‘아구굿’) 운동을 펼치고, 원주의 장일순 선생 아래서 생명살림과 협동조합 운동을 경험했다. 그렇게 그는 언제나 사람들 속, 한 귀퉁이에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이야기가 노래가 되고 극이 되었다. 늙은 퇴역 하사관을 위해 지은 ‘늙은 군인의 노래’, 공장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 축가로 지은 ‘상록수’, 탄광 생활 속에서 나온 노래극 <아빠 얼굴 예쁘네요>, 농사꾼 생활에서 싹튼 노래극 <개똥이> <엄마, 우리 엄마>가 그런 노래들이었다.
그렇게 나왔으니 그 울림은 얼마나 깊을까. 시인 김지하가 회고한 1971년 겨울 김민기와 그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느낌은 이랬다. “저 밑바닥의 밑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깊고 애잔한 저음으로 슬픔을 지극한 데까지 끌어올리는, 그것은 노래가 아니었다. 차라리 아슬아슬하게 절제된 통곡이었고 거센 압박 속에서 여러 가지 색채로 배어나고 우러나는 깊디깊은 우울의 인광이었다….” 너무 현란한 수사지만, ‘밑바닥의 밑바닥’은 정곡이다.
유신체제가 광란으로 치닫던 1978년, 죽음의 공포 속에서 제작했던 노래극 <공장의 불빛>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사법부는 죄 없는 이들을 사형대에 올렸고, 중앙정보부는 멀쩡한 사람들을 간첩으로 조작하다가 죽여 버렸다. 어린 여공들을 두들겨 패고, 군홧발로 밟고 심지어 똥물까지 퍼붓던 시절이었다. 그들과 함께하지 못했다는 자책감 속에서 <공장의 불빛> 카세트테이프는 불과 두 달 만에 완성됐다. 그것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그는 남산으로 끌려갔다.
직후 그는 서울을 떠나야 했다. 저들이 주리를 틀어 협력자를 다그치면, 버틸 재간이 없었다.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 이화여대 노래패 ‘한소리’, 경동교회의 ‘빛바람중창단’ 등이 노래했고, 이호준 조원익 배수연 등 당대의 연주자들이 반주를 했고, 가수 송창식은 그들에게 연습실을 제공했던 터였다. 그래서 주민등록까지 옮긴 곳이 고향 익산의 한 농가였다. 김제로 옮겨 소작할 때는 소설가 황석영 형을 만나러 광주에 들르곤 했다. 그곳 활동가들과 야학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탄생한 것이 들불야학이었다. 이듬해 5·18항쟁 때 광주의 작은 들불이 되었던 들불야학.
박정희 피살과 함께 유신체제가 종언을 고했으면 대처로 나올 법도 했지만, 그는 경기도 연천군 전곡에서 연천의 민통선 안으로 더 멀리 갔다. 겨울철 농한기엔 탄광에서 광부로, 하의도 김 양식장에서 품팔이로 나섰다. 그가 다시 서울로 나온 건 1983년 겨울 화재가 그의 집을 홀랑 삼켜버리고 난 뒤였다. 마침 서울의 노래패들이 그를 간절히 찾던 때이기도 했다. 이듬해 그는 그들과 노래극 <개똥이> 작업도 하고, 노래운동의 전설이 된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 음반 1집을 제작했다.
2003년 11월9일 <지하철 1호선> 2000회 기념공연이 있었다. 공연을 앞두고 그는 초청할 분들의 명단을 정리했다. 그러나 곧 포기했다. 너무 많았다. 그러고 보니 그의 삶이란 게 그분들로 이루어진 산맥이나 다름없었다. 그 어느 봉우리 혹은 능선에 바람 한 줄기 얹히고 새가 울면, 그것이 노래가 되었다.
대학 초년 시절 뵀던 백낙청·김윤수·염무웅 선생 그리고 김지하 시인, 야학과 도시산업선교회, 그리고 대학 문화운동과 원주 생명운동을 함께했던 이들, 부천의 노동자들과 공장의 불빛 제작팀, 익산 김제 전곡 연천 등지에서 함께 농사짓던 분들, 광산과 덕장에서 사잣밥을 함께 먹던 이들. 그들은 그의 삶과 창작의 대간이었다. 14년간 운행하며 65만명의 관객을 실어날라 한국형 소극장 뮤지컬의 가능성을 보여준 <지하철 1호선>은 대간에서 분기한 정맥이었다. 재즈의 나윤선을 비롯해 배우 김윤석 설경구 황정민 등은 그곳에서 자란 나무들. 또 전인권 김광석 안치환 노찾사 노영심 등은 소극장 콘서트라는 또다른 정맥으로 분기했다.
어머니가 살림을 서울로 옮겨오신 뒤였다. 온갖 사람들이 어머니를 찾아왔다. 지게꾼도 있었고, 여객 전무도 있었고 한센인도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친어머니처럼 대했다. 어머니가 오랫동안 조산원을 하시며 받은 아기들이었다. 얼마나 되는지 궁금했다. “아마 2, 3천명 되겠지?”
어머니는 아기를 받으셨으니, 그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도록 응원하는 건 나의 몫? 운명이란 게 그런 것 같았다. ‘개똥이’ 작업 이후 그의 관심은 어린이로 옮겨갔다. 세상을 바르게 보는 시선이고 온전하게 드러내는 거울. 어린이·청소년 음악극은 <아빠 얼굴> <우리 엄마> 등을 거쳐 이제 학전의 가장 우뚝한 산맥으로 자리잡았다. <모스키토> <분홍병사> <의형제> <더 복서> <굿모닝 학교> <도도>는 물론이고 어린이무대 팀이 기획 제작한 <슈퍼맨처럼> <우리는 친구다> <고추장 떡볶이> <무적의 3총사> 등은 학전을 대표하는 무대다. 문화적 황무지에 버려진 초·중·고생을 위한 음악극이다. 2008년 손님을 가득 채운 채 잘 달리던 지하철 1호선의 운행을 돌연 멈추게 한 것도 실은 어린이·청소년 레퍼토리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김제에서 농사지을 때였다. 모내기 끝나면 물꼬 챙기는 게 가장 중요한 일. 넘치면 물꼬의 흙 한 삽 떠서 터주고, 모자라면 물꼬를 막는 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논두렁 물꼬 앞에 엎드려 넙죽 절했다. 농사짓는다며 제가 한 일이란, 물꼬에 흙 한 삽 얹거나 떠내는 것뿐이었다…. 노래 농사라고 다를 게 무언가.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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