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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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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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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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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의 광부는 서로의 헤드랜턴 불빛에 의존해 식사를 한다. 그곳에서 석탄가루 섞인 도시락을 그렇게 먹으며 사는 것은 고역이자 굴욕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온몸으로 감내하며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의지가 되려 한다. 막장에선 삶의 마지막 희망이 별처럼 빛난다.”
“내가 비싼 구두나 정장을 원한다면 그들의 무관심이 나를 괴롭히겠지만, 나는 나막신을 신고서도 어떻게든 살아갈 것입니다.” 노동을 추하게 여긴 당대 미술계의 무관심을 오히려 경멸하며 밀레가 한 말. 이 말을 빌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자신의 각오를 전했다. 그는 바르비종에 눌러앉아 일하는 이들에 천착한 밀레의 뒤를 따르려 했다. “나는 계속 가난할 것이며, 화가일 것이고, 인간이고 또 자연 속에 살 거야. 자연에서 떠난 인간은 소유욕으로 가득 차고, 자신이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인간이 되고 말지.” 이 편지를 쓸 즈음 그는 초기작 <감자를 먹는 사람들>을 완성했다. 다음은 고흐의 설명. “감자를 심고, 거두고, 이제 그 감자를 집어든 그 손을 그리고 싶었어. 얼마나 정직하게 한 끼의 식사를 일궜는지 말하고 싶었던 거야.”
황재형을 화가의 길로 이끈 것은 고흐였다. 특히 <감자…>는 깊은 인상을 남겼다. 황재형이 대학 시절 야학으로 공장으로, 나중엔 광산으로 뛰어든 것은 그런 고흐의 영향이 컸다. 변혁에의 열정도 컸지만, 인간의 조건과 삶의 진실을 찾으려는 열망이 더 컸다. 2~3개월씩 광산촌으로 찾아가던 중 1980년 황지탄광에서 갱도 매몰 사고로 사망한 광부 김봉춘씨의 작업복과 조우한다. 명찰 ‘황지 330’으로 존재하던 주인은 갔고, 해어지고 주름진 작업복만이 그의 삶과 죽음을 증언하고 있었다. 그를 중앙무대에 등단시킨 <황지 330>은 그렇게 탄생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소재주의를 철저하게 청산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관찰자의 시선을 벗어버리기로 했다. 1982년 9월 가족과 함께 서울을 떠났다.
고흐는 스물여섯에 기독교 복음주의의 열정에 휩싸여 벨기에 탄광촌 보리나주에서 전도사로 활동한다. 일주일에도 대여섯 사람씩 죽어 나가는 그곳에서 광부들과 함께 그들과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가진 것은 병들고 다친 이들에게 나눠줬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알게 되는 건 …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사랑을 느낄 때지. … 이 사랑이 시작될 때 내 존재를 주저 없이 내던지지 않으면 인생엔 아무런 승산도 없을 거야.”
강원도에 광산은 무수했다. ‘어디로 갈거나’, 강릉시외버스터미널 인근 식당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옆 식탁에서 쫄딱구덩이(광부 몇몇이서 개발한 탄광. 영세한 탓에 사고율이 매우 높다)를 놓고 업자들이 흥정하고 있었다. 생산량은 얼마고 수익은 얼마인지 따지던 그들이 일 년에 몇 명이 산재를 당하는지를 놓고 밀고 당겼다. 6명? 12명? 가격은 산재 숫자에 따라 달라졌다. 연간 최소 여섯에서 많게는 열두 명을 탄더미에 묻어버리는 그런 탄광을 놓고 침 튀기며 이문을 따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잡은 터가 태백이다. 올해로 31년째. 1991년 서울 가나아트에서 열린 첫 전시회를 <한겨레>는 ‘탄광촌에서 산업화의 모순을 캔다’는 제목 아래 소개했다. 16년 뒤 다시 열린 전시회에서 그는 탄광 화가, 광부 화가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불려도 되나 싶었지만, 무어라 부른들 어떠랴. 저야 어떤 막장에서든 그가 갈망하던 진실을 캐면 될 일.
“인물화나 풍경화에서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표피적인 감상이 아니라 뿌리 깊은 고뇌야. 내 그림을 본 사람들이, 이 화가는 깊이 고뇌하고 있다고, 정말 격렬하게 고뇌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의 경지에 이르고 싶어.”(1882.7) 고흐는 단지 농부 화가가 아니라 일하는 이들의 고통과 절망과 꿈을 드러내고 싶었다. “예술은 사람의 손에서 나오지만 그저 손으로만 빚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이란 깊은 샘에서 솟는 것이지.”
황재형에게 탄광은 단지 거친 노동과 지독한 가난 그리고 절망과 좌절을 표상하는 곳이 아니었다. 갱도는 자본이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욕망의 막장이었고, 노동자가 단번에 목돈을 만질 수 있다고 믿었던 욕망의 마지막 끈이었다. 권력과 결탁한 자본의 횡포가 극렬했고, 더는 갈 곳 없는 사람들의 절망이 엉켜 있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막장의 광부는 서로의 헤드랜턴 불빛에 의존해 식사를 한다. 그곳에서 석탄가루 섞인 도시락을 그렇게 먹으며 사는 것은 고역이자 굴욕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온몸으로 감내하며, 서로에게 위로가 되고 의지가 되려 한다. 막장에선 삶의 마지막 희망이 별처럼 빛난다.”
하긴 세상에 막장이 어디 거기뿐일까. 인간과 생명을 상품화하는 곳, 도박과 투기가 노동을 경시하는 곳이 바로 막장이다. 그렇게 본다면, 막다른 곳에서 서로 기대고 위로하며 함께 일어서려는 탄광의 막장은 삶이 어느 곳보다 더 뜨겁게 숨쉬는 곳이었다. 탄가루 범벅에 온갖 삶의 찌꺼기와 똥물까지 섞여 흐르는 사북 탄천에 지는 노을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 슬프면서도 아름다웠다.
안경 낀 사람은 갱에 들어갈 수 없다. 심각한 근시였던 그는 콘택트렌즈로 위장하고 취업했다. 집에 올 때까지 렌즈를 뺄 수 없었다. 결국 안구와 렌즈 사이에 낀 탄가루 때문에 극심한 결막염을 앓았다. 시력을 상실할 정도였다. 3년 만에 곡괭이와 삽을 놓았다.
안경 낀 사람은 갱에 들어갈 수 없다. 심각한 근시였던 그는 콘택트렌즈로 위장하고 취업했다. 집에 올 때까지 렌즈를 뺄 수 없었다. 결국 안구와 렌즈 사이에 낀 탄가루 때문에 극심한 결막염을 앓았다. 시력을 상실할 정도였다. 3년 만에 곡괭이와 삽을 놓았다. 먹고살 일이 막막했지만, 그보다 노동도 못하며 그곳에 있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때 그를 도와준 것은 함께 햇돼지 잡고, 탄가루 밥을 먹었던 동료들이었다. 저희보다 더 못사는 그의 빈 독에 쌀을 채워주고, 찬이나 옷가지를 슬그머니 놓고 가기도 했다. 마침 그곳에선 장애 어린이들이 대수롭지 않게 버려져 길러지고 있었다. 부부는 그 아이들을 거두어 돌보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림을 그렸다.
<황지 330>의 각오가, 다 타버린 연탄재처럼 설 자리가 없는 늙은 광부(<아버지의 자리>)로 올곧게 이어진 것은 그런 믿음과 연대 덕분이었다. 월급날 줄 서 있는 아낙들의 설렘(<월급날>), 비탈 위 판잣집의 한없는 가벼움(<삶의 무게>), 질주하는 병원차와 요동치는 어둠(<앰뷸런스>), 담장 밑 달리아와 접시꽃의 희미한 희망, 늘어선 루어(가짜 미끼 낚시)의 반짝이는 눈빛과 숨죽인 선탄부 아낙의 슬픈 눈(<메탈 지그와 선탄부>) 등은 그가 막장에서 캐낸 삶의 원석들이었다.
열정이 충만할 때 고흐는 말했다. “텅 빈 캔버스와 마찬가지로 우리 삶은 무한하게 비어 있는 여백. … 삶이 아무리 공허해 보여도, 확신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쉽게 물러서지 않는다. 온갖 난관에 맞서, 일을 하며, 저항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고흐는 말년 이렇게 절규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지금 바로 나를 정신병원에 가둬 버리든가, 아니면 그림만 그릴 수 있게 내버려다오. 제발….”
황재형에게도 죽고 싶을 정도로 절망스러울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의 옆에는 그의 삶을 더 사랑하고 믿었던 아내, 피할 수 없는 막장을 부둥켜안고 살던 동료들이 있었다. ‘고흐처럼 주저앉지 말자!’는 그의 다짐은 덕분에 이뤄질 수 있었다. 그를 탄광의 막장으로까지 이끌었던 고흐였지만, 그는 결국 주위의 냉대와 무관심과 불통에 무너졌다. 그러나 황재형은 건재하다. 삶의 진실과 인간의 진정성이 핏빛 노을처럼 검은 산을 물들이고, 별들이 막장을 빛내고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
고흐는 세상과 불화하면서 자화상에 집착했다. 화력 30년이 훨씬 넘었지만 황재형은 아직 저를 주제로 삼을 수 없다. “그림 그린다는 것, 남의 슬픔 위에 내 기쁨을 건설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팔아서 먹고사는 것,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요. 내가 자화상을 그린다면 그림 속 나는 아마 괴물이거나, 경멸하는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겠죠.” 아직 그에겐 빚이 많다. 일하는 이들의 강인한 생명력을 담으려 했던 <태백에서 동해로>는 22년째 보완중이고, 한 큐레이터의 눈물샘을 터뜨려버린 <아버지의 자리>도 작업대에 걸려 있고, 그 맞은편엔 한 아낙이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
“모든 것은 꿈에서 시작된다. 꿈 없이 가능한 일은 없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 앙드레 말로는 공화제의 이상을 실천하기 위해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다. 황재형은 20대 때 꾸었던 꿈을 여지껏 살며 그린다. 검은 산, 검은 물, 검은 이들의 이마에 빛나는 핏빛 노을, 아낙의 기다림과 늙은 아비의 눈물, 백두대간의 생명력…. 그 꿈이 온전하게 화폭에 담기는 날 그는 거기에 스며 있을 것이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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