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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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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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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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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에게 지란이 군자의 상징이었다면, 벗들에게 인간관계의 으뜸은 지란지교(芝蘭之交)였다. 그러고 보니 선장님의 거듭된 지란 자랑이 예사롭지 않다. 음울한 유배지를 인문의 향기 그윽한 지란의 땅으로 바꿨다는 손암 정약전 선생을 기억하라는 뜻인가.
“흑산도는 296개의 섬 가운데 285개가 무인도이지만, 무인도라고 소홀히 봐선 안 됩니다. 겉보기엔 바위와 황토뿐이지만, 여름이면 지란이 손가락 꽂을 틈도 없이 자라고, 기암괴석은 금강산 못지않습니다.”
유람선은 예리항을 떠나, 가도 솔섬을 거쳐 다물도로 향한다. 크고 작은 무인도를 지날 때마다 유람선 선장의 지란 자랑이 빠지지 않는다.
지란(芝蘭)? 공자는 군자에 비유했던 지초와 난초. “지란은 깊은 숲속에 나지만, 사람이 없다 하여 향기를 거두지 않는다.”(芝蘭生於深林 不以無人而不芳) 함께 있을 때나 홀로 있을 때나 그 향기 한결같다는 것이다. <명심보감> ‘공자편’엔 이런 이야기도 있다. “착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마치 난초의 방에 든 것과 같아서/ 오래 있으면 그 향기를 맡지 않아도 그와 같게 되고~.”
공자에게 지란이 군자의 상징이었다면, 벗들에게 인간관계의 으뜸은 지란지교(芝蘭之交)였다. 그러고 보니 선장님의 거듭된 지란 자랑이 예사롭지 않다. 음울한 유배지를 인문(人文)의 향기 그윽한 지란의 땅으로 바꿨다는 손암 정약전 선생을 기억하라는 뜻인가. 선생의 아우 다산 정약용은 천주교도로 몰려 죽임을 당한 스승 권철신에게 이런 헌사를 남겼다. “그의 집안에 들어가는 사람은 온화한 기운이 감돌고 향기가 엄습하는 것이 마치 지란의 방에 들어간 듯한 느낌을 받는다.” 다산은 형님이 계신 흑산을 ‘그윽할 현(玆)’의 현산이라 했다.
흑산도. 목포에서 예리항까지는 92.7㎞, 요즘 쾌속선으론 두 시간 거리. 그러나 바람에나 의지하던 시절 바람 좋아야 보름 만에 당도할 수 있었다. 비금, 도초도를 벗어나면 갑자기 파도가 거칠어진다. 대형 여객선 속에서도 멀미에 뱃바닥을 구를 정도다. 그 옛날 일엽편주 속에서 보름 넘게 사투를 벌여야 했을 유배객의 절망은, 차라리 가까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보다 더했을 것이다. 약전은 입도하면서 호를 매심(每心)에서 손암(巽庵)으로 바꿨다. 손(巽)은 들어간다는 뜻이니, 한번 들어가면 돌아올 수 없음을 각오한 것이다.
다산 또한 이 사실을 알고, 함께 유배길에 올랐던 형님과 나주 율정점에서 헤어지면서 이렇게 애통해했다. “~목청 억지로 바꾸려니 오열이 되고 마네./ 멀고 먼 흑산도는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곳,/ 형님이 어찌 그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이빨이 산과 같은 고래가,/ 배를 삼켰다 뱉었다 하며,/ 쥐엄나무만한 지네에,/ 독사가 다래덩굴처럼 엉켰다네,~” 다산이 흑산을 현산이라 부른 것은 이름마저 ‘어둡고 처량하여 두려운 느낌을 더하는 까닭’이었다.
손암은 일단 흑산도 남동쪽 하루이틀 거리의 우이도에 정착했다. 80여년 뒤 유배된 최익현 역시 처음엔 우이도에 머물렀다. 이들은 아예 그곳을 소흑산도라 이름하고, 진리·예리 등 흑산도의 지명을 옮겨놨다. 조정에서 점검 왔을 때 흑산도인 양하기 위해서였다. 흑산에 대한 두려움이 그만큼 컸던 것이다. 그러나 그곳엔 먹고살 게 너무 없었다. 이들은 결국 먹을 걸 찾아 본섬으로 들어갔다.
비금도를 떠나 쾌속선으로 40~50분쯤 가면 큰 산 하나가 눈에 가득 들어온다. 시커먼 덩어리가 과연 흑산이다. 이번엔 관광버스 기사의 자랑이다. “돌아보세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열두 굽이 길을 여러분은 오르고 있습니다. 왜 흑산인지 궁금하지요. 이 섬의 초목 95%는 상록수입니다. 그중의 90%가 동백이고, 나머지가 구실잣밤나무, 굴거리 등입니다. 가까이서 보면 푸르지만, 조금만 벗어나면 섬 전체가 검푸르게 보이고, 10분 정도만 나가면 검게 보입니다.”
이름만 흑산이었던 건 아니다. 없는 것도 많다. 특히 먹고사는 것과 직결되는 비도 드물고, 눈도 드물다. 부쳐 먹을 땅도 거의 없다. 손바닥만한 땅도, 가물다 보니 곡식을 키우지 못한다. 고구마가 유일하게 버티는 작물이다. 인심이 후할 리 없었다. 그런 흑산도에서도 남동쪽 귀퉁이에 들어선, 오갈 데 없는 마을이 사리다. 그 척박한 마을은 손암과 함께 바뀐다.
손암이 아이들을 가르쳤던 사촌서실에는 우물이 있다. 목욕을 하려면 쾌속선 타고 목포에나 가야 하는 곳이 흑산도다. 수원지 구실을 하는 작은 저수지도 단 한 곳이며, 이것으로 5000명 가까운 주민들이 살아간다. 손암이 살던 시절엔 그마저 없었으니, 주민들이 기댈 것은 하늘의 비와 마을의 우물뿐이다. 그 귀한 우물을 손암의 거처 앞에 파는 것으로 마을 사람들은 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표시했다.
손암은 달랐다. “상스러운 어부들이나 천한 사람들과 친하게 어울려 귀한 신분으로서의 교만을 부리지 않았다. 이 때문에 섬사람들이 매우 좋아하여 서로 다투어 자기 집에만 있어주기를 바랐다.”(다산) 다산은 ‘오랑캐 같은 섬사람’이라고 했지만, 손암은 바로 그들과 함께 먹을 것을 구하고, 그들의 의문을 풀어주고, 문맹을 깨치고, 함께 시를 지었다. 6척 거구에 ‘말술도 넘어 섬술’을 마시며 어울렸으니 사람들은 다투어 그 곁에 모였다. 그 속에서 어부들을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학 서적 <현산어보>를 지었고, 나무꾼을 위한 삼림 육성 정책 보고서인 ‘송정사의’를 지었고, 문순득의 표류기인 ‘표해시말’을 기록해 오키나와·필리핀·중국의 문물을 소개했다. 지난해 정부는 그런 손암을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했다. 지금까지 헌정된 사람은 세종대왕·장영실·허준·우장춘 등 모두 29명뿐.
그곳에 전해오는 평판도 다르지 않았다. 목포성당 첫 주임신부였던 프랑스인 알베르 데에 신부의 사목보고서는 “그(손암)에 대한 평판은 존경에 가득 찬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그를 겸손과 정결함의 모범으로 이야기했다”고 했다. 1814년 여름 다산은 편지를 보내 그해 안으로 유배에서 풀려날 수 있을 것 같다며, 귀로에 형님을 뵈러 가겠노라고 전했다. 그 험한 바닷길을 아는 터라, 손암은 아우가 그런 바다를 두 번 건너지 않도록 우이도로 떠나려 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그를 놔주려 하지 않았다. 안개 자욱한 밤 우이도 사람을 불러 섬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이를 알아챈 동네 사람들이 쫓아와 그를 사리로 나포했다. 수개월 동안의 간곡한 설득 끝에야 손암은 우이도로 이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손암은 아우를 만나지 못했다. 정적들의 농간으로 다산의 해배는 4년 늦춰졌고, 해배 1년 전 손암은 숨을 거뒀다.
“무너져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했던 이들을 누가 왜 이런 곳으로 쫓아냈을까요. 그건 바로 썩은 정치였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조선은 망국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 정치는 계속되고 있으니,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신문받은 죄인으로서 압송하던 장교들을 울며 작별케 한 사람”, “세상을 뜨자 유배지의 모든 사람들이 마음을 다하여 장례를 치러준 사람” 손암 정약전. 그는 신분제의 나라 조선에서 신분을 잊고 민중 속으로 들어가, 마침내는 민중과 하나가 된 ‘민중의 선비’(사학자 이덕일)였다. 정쟁에 찌들고, 권력과 벼슬자리에 목을 매고 있던 자들이 보기에 위험천만한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촌서실 툇마루에 앉으니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의 울분이 비장하다. “무너져가는 나라를 바로 세우고자 했던 이들을 누가 왜 이런 곳으로 쫓아냈을까요. 그건 바로 썩은 정치였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조선은 망국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 정치는 계속되고 있으니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그러나 흑산의 입장에선 행운이었다. 손암은 “청산이 그 무릎 아래 지란을 기르듯”(서정주 ‘무등을 바라보며’) 아이들을 가르치고, 시와 문학의 향기를 흑산에 뿌렸다. 그 앞에서 “가난은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았다.” 심리의 장 노인, 문암의 계고재, 우이도의 박생, 사리의 장창대 등이 더불어 일도 하고 시도 지었으니, 흑산은 곳곳이 지란의 땅이었다. “서너 나그네가 가을 빛을 따라와/ 시 지으며 흥을 돋우니 재주를 따지지 않네/ 서늘한 바람 나무에 있건만 매미는 아직 울고/ 맑은 달빛 모래밭에 가득하니 기러기 돌아오려네/ 푸른 산 오막집에 추위가 스며들자/ 사방 이웃들이 막걸리 잔을 건네네/ 나무꾼에 고기잡이까지 기쁘게 친구가 되니/ 집집마다 마음껏 웃음꽃 피었구나.” 이 얼마나 향기로운 정경인가. 다시 미당을 인용하면, 손암은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늘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하는 대인이었다.
유람선은 다물도 기암괴석을 돌아 예리항으로 돌아간다. 선장은 예의 그 지란 자랑이다. “날씨 화창한 날 흑산도로 오세요. 손가락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빼곡히 핀 그 지란의 향기….”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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