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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9.24 19:12 수정 : 2013.09.25 14:32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곽병찬 대기자

만해 묘소 가까이엔 역시 기독교 대표로 33인에 참가했다가 변절해 내선일체와 학병 지원과 참전을 독려했던 박희도의 묘지가 있다. 비슷한 일을 했던 장덕순의 장대한 묘소도 가까이 있다. 한결같이 묘비명엔 항일운동의 사실만 있지, 친일의 기록은 뺐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첫 연도석에 ‘목마와 숙녀’의 한 구절을 새긴 까닭을 구태여 물을 필요는 없다. 시인 박인환 묘 가까이엔, 불꽃처럼 피었다가 스물일곱에 홀연히 떠나버린 가수 차중락의 작은 무덤이 있다. 묘비명은 시인 조병화의 추모시로 대신했으니, 거기에 그 뜻이 알뜰히 새겨져 있다. “세월은 흘러서 사라짐에 소리 없고/ 나무닢 때 따라 떨어짐에 소리 없고/ 생각은 사람의 깊은 흔적 소리 없고/ 인간사 바뀌며 사라짐에 소리 없다.// 아, 이 세상 사는 자, 죽는 자, 그 풀밭/ 사람 가고 잎 지고 갈림에 소리 없다”(‘낙엽의 뜻’)

인간사 사라짐에 소리 없음이야 망우리 고개 남쪽 망우산 공원묘지나, 고개 북쪽 검암산 동구릉이나 다를 게 없다. 동산만한 무덤에 안장됐다고 죽어서 호령할 자 없고, 떠돌이라 하여 죽어서 기죽을 이 없다. 이미 소리를 잊고 근심을 놓았는데, 왕후장상이고 민초고 무슨 차이가 있을까. 왕조를 세우고 궁궐을 신축했고, 장대한 유택의 터까지 손수 찾아낸 태조 이성계였다. 그러나 그는 한평생 근심을 피하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건원릉 터를 잡고는 ‘아아 이제야 근심을 잊게 되었구나’(吾憂忘矣)라고 말했을까. 세상은 군왕이 쉬다가 이런 말을 남겼다고 고개와 그 일원을 망우리라 했다. 군왕의 한마디가 지명이 되었으니 그 위세를 알리는 데 이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따져보면 천하를 호령하는 군왕 역시 좁쌀 같은 근심에 평생 속을 끓였음을 보여주는 표지일 뿐이다.

건원릉 주변엔 태조 이후 8기의 왕릉이 더 들어서 동구릉, 동쪽 왕들의 무덤이 되었다. 고개 남쪽 망우산 일대는 백성들의 차별 없는 유택이 되었다. 고개를 남북으로 왕과 백성이 죽어서 마주보고 있는 형국이다. 살아서는 상종이 불가능한 멀고 먼 거리였지만 죽고 나니 고개 너머였던 것이다. 그러면 왕들과 중전 17위가 9기에 봉안될 정도로 동구릉은 길지였으니, 왕조는 평안했고 왕들은 근심을 털 수 있었을까.

태조는 일찌감치 건원릉 터를 잡았지만, 자식들 간의 피비린내 나는 칼부림(왕자의 난)을 지켜봐야 했다. 방원(태종)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지만, 패장이 되어 함경도 고향 땅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그곳에서 그는 한양으로 모시려는 차사를 차례로 죽이는 몽니나 부리는 늙은이였던 것이다. 그의 증손자 문종(현릉)은 아들 단종이 친동생 수양대군에 의해 폐위되고 종내 죽임까지 당했다. 선조(목릉)의 경우 후궁 김씨 소생인 광해군에 의해 인목왕후 소생인 적자 영창대군이 죽임을 당했다. 광해군 역시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으니 선조는 두 아들 모두 박복했다. 특히 영조(원릉)는 살아서 자신의 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였다. 그로 말미암은 시달림이 얼마나 컸으면 자식을 묻으면서 사도(思悼, 생각하노니 슬프구나)라는 시호를 내리고 제 변명을 줄줄이 늘어놓은 묘지명을 직접 작성해 아들의 주검 옆에 두었다. ‘너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늙은 아비로 하여금 만고에 있을 수 없는 일을 하게 만들었구나….’ 왕후장상의 양택과 유택이 따로 있었을지 몰라도, 삶의 박복함이야 시중의 민초와 오십보백보였다.

고개 남쪽 망우리 공원묘지는 규모(83만)는 동구릉(165만)의 절반에 불과하다. 그러나 1933년 개장해 1973년 만원으로 폐장될 무렵엔 유택이 2만8500여기나 있었다. 폐장 이후 적극적인 이장 정책으로 지금은 8440여기만 남았지만, 여전히 죽은 자와 산 자로 북적인다. 왕족과 정승 판서의 무덤부터 이름없이 죽어간 천민까지, 혹은 일제에 저항하다가 옥사한 분들부터 일제에 붙어 호의호식하던 이들까지, 승려부터 대중연예인까지 위아래 없이 묻혀 있으니, 사람들이 꿈꾸던 세상의 저승 버전이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된 남편 김현근과 묻혀 있는 명온공주의 묘는 이승의 권력 무상이 절절하다. 명온공주는 순조의 맏딸이고, 김현근은 당대 최고의 세도가 집안이었지만, 이제는 돌보는 이 없어 잡초가 봉분을 가려버렸다. 묘비조차 없는, 딸이 보낸 편지 한 장 달랑 봉분에 놓인 한 가난한 어머니의 무덤은 그에 비하면 찬란하다. “엄마, 현경이가 요즘 많이 아파요. 현우는 얼마 전 반에서 1등 했죠. 엄마가 곁에 계셨으면 좋아하셨을 텐데…. 엄마, 그럼 다음주에 올게요. 큰딸 현숙 올림.”

함석헌 선생이 무진 풍파에 지칠 때마다 찾은 곳도 망우리였다.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온갖 고초를 다 당했지만, 정권이 조작해 유포한 비열한 추문은 특히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그럴 때면 선생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망우리 유택을 찾아왔다. 그곳에서 도산 선생의 삶과 죽음을 상고하면 마음은 맑아지고 견결해졌다고 한다. 힘써 진리를 깨치고, 진리의 삶에 온몸을 던져 실천했던(무실역행) 도산의 삶이 선생에게 위로이자 빛이 되었던 셈이다.

함석헌, 김교신, 이승훈 선생 등 구한말 및 일제하 위대한 사상가들의 스승이었던 다석 유영모 선생은 일찍이 죽음을 통해 삶의 진실을 깨쳤다. 열세 형제 가운데 둘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삶은 언제나 죽음과 동행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의 나이 49살 때 떠난 사학자 호암 문일평 선생의 죽음은 삶을 일대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이후 다석은 부인과 부부관계를 끊고 오누이로 지냈으며, 하루 한 끼만 먹는 일종식을 지켰다. 다석에게 죽음이란 씨알이 깨져 썩는 것이었으니,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문과 같았다. 종(種)의 세계가 깨어지고 유(類)의 세계로 나아가는, 곧 개체의 삶에서 공동체의 삶으로 건너가는 길목이었던 것이다. 호암 묘도 도산 선생 가까이에 자리를 잡았으니, 두 분 선생은 그곳을 영성을 깨우고 삶을 바로 세우는 곳으로 삼았을 것이다.

이제는 터만 남은 도산 선생의 묘 아래에는 그를 아버지처럼 섬겼던 유상규 선생의 묘가 있다. 자신보다 두 해 먼저 세상을 뜬 유 선생이 얼마나 그리웠던지, 도산은 유언으로 그의 주검 곁에 묻어 달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이 아름다운 동행은 인근의 소파 방정환과 아동문학가 최신복으로도 이어진다. 망자의 유언에 따라 최신복 부부가 소파 곁에 묻혔고, 부친 또한 그 위에 묻혔다. ‘동심여선’(童心如仙)이었다.

“당신은 나의 죽음 속으로 오셔요./ 죽음은 당신을 위하여 준비가 언제든지 되어 있습니다.…”(‘오셔요’) 만해 한용운 스님은 일찍이 생사의 경계를 넘으셨다. 한 점 흔들림 없이 일제에 맞섰던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활동 분야는 달랐지만, 그런 사생관으로 살다 간 이가 종두법을 개발해 보급한 지석영 선생이다. 그는 “우리 가족에게 먼저 실험해 보아야 자신하고 쓸 수 있지 않겠느냐”며 가족을 설득했다.

이승의 짧은 부귀를 위해 영원한 생명을 포기한 이들도 곳곳에 있다. 만해 묘소 가까이엔 역시 기독교 대표로 33인에 참가했다가 변절해 내선일체와 학병 지원과 참전을 독려했던 박희도의 묘지가 있다. 비슷한 일을 했던 장덕순의 장대한 묘소도 가까이 있다. 한결같이 묘비명엔 항일운동의 사실만 있지, 친일의 기록은 뺐다. 그런 장덕순의 묘비명은 그와 비슷한 행로를 걸었던 김활란이 썼다. 세상에 죽음 앞에서 드러나지 않는 건 없다. 아무리 호사와 미사여구로 꾸민 유택이라도, 후세의 타액을 피할 수 없는 무덤이 있고, 아무리 초라해도 들꽃 한 송이 때마다 올려지는 무덤이 있다.

갈 것은 가고 남을 것은 남는다. 부귀 권세의 몸은 썩어버리지만, 맑고 높은 정신과 영혼은 영원하다. 시절이 하 수상하고, 마음 또한 어수선하면, 저 동구릉에서 망우리 사이 그 어디쯤에 자리잡고 한나절 누워라

김광규 시인은 호사와 권세만 부리다 떠난 이의 거짓된 묘비명 앞에서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묘비명’)라고 통탄했다. 그러나 세상에 죽음 앞에서 드러나지 않는 건 없다. 작곡가 채동선 선생이 생전에 출간한 12곡 가운데 8곡은 해방 후 금지곡으로 묶였다. 노랫말이 모두 월북한 정지용의 시라는 이유에서였다. 특히 ‘고향’은 박화목의 시 ‘망향’으로, 또 이은상의 ‘그리워’로 노랫말을 바꿔야 했지만, 1988년 30여년 만에 결국 정지용의 시와 함께 해금됐다. 갈 것은 가고 남을 것은 남는다. 부귀 권세의 몸은 썩어버리지만, 맑고 높은 정신과 영혼은 영원하다. 시절이 하 수상하고, 마음 또한 어수선하면, 저 동구릉에서 망우리 사이 그 어디쯤에 자리잡고 한나절 누워라.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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