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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0.22 19:14 수정 : 2013.10.22 19:53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곽병찬 대기자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읍내를 지나 손곡 마을로 향한다. 가을걷이를 끝낸 들판은 햇살만 눈부신데, 길가는 나락이며 참깨며 고추며, 온갖 결실들로 가득하다. 넓게 팔 벌려 들을 감싸는 낮은 산들이 양쪽 모두 한눈에 들어올 즈음, 바람이 온통 고소하다. 어느 철모르는 손주 녀석이 할머니와 깨를 터는가, 참깨 향기가 천지 사방으로 톡톡 튄다.

“산그늘 내린 밭 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 한 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 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낸다. …”

창고려니 했지만, 간판은 예사롭지 않다. ‘이달의 꿈’ 그리고 ‘예술극장, 광대패 모두골’. 빛바랜 행색과 너른 들판을 보아하니 마을엔 일손이며 곳간이며 부족할 텐데, 무슨 예술극장 광대패인가. 게다가 이달의 꿈이라니, 도대체 이 마을이 꾸는 꿈이 수상쩍다.

김준태 시인의 ‘참깨를 털면서’ 덕분에 비로소 나는 아주 오랜 시간 속으로 회귀하는 연어가 되었음을 실감한다. 손곡리 할머니는 백운산 여신이 되었고, 그곳을 지키는 늙은 자식들 역시 전설이 되어간다. 그곳에선 지금도 할머니와 손주는 참깨를 털고 있었다. 마을 고샅, 길가에 농가들 하나둘 이어지고, 어수룩한 건물 하나 덜렁 서 있다. 창고려니 했지만, 간판은 예사롭지 않다. ‘이달의 꿈’ 그리고 ‘예술극장, 광대패 모두골’. 빛바랜 행색과 너른 들판을 보아하니 마을엔 일손이며 곳간이며 부족할 텐데, 무슨 예술극장 광대패인가. 게다가 이달의 꿈이라니, 도대체 이 마을이 꾸는 꿈이 수상쩍다.

맞은편엔 손곡 이달 선생의 시비가 있다. “시골집 젊은 아낙이 저녁거리가 떨어져/ 빗속에 보리를 베어 수풀 속을 지나 돌아오네/ 축축한 생섶은 불도 붙지 않고/ 문에 들어서니 어린 딸은 치마자락 붙잡고 우는구나.” 이런 시도 남겼다. “밭고랑에서 이삭 줍는 시골 아이 하는 말/ 하루종일 동서로 다녀도 바구니가 안 차네요./ 올해엔 벼 베는 사람들도 교묘해져/ 이삭 하나 남기지 않고 관아 창고에 바쳤다네요.” 보릿고개와 추수 끝난 뒤의 풍경이다. 무능한 조정과 부패한 관리, 잇따른 호란에 초근목피로 버티던 백성을 그렸다. 응시하는 시인의 시선엔 차가운 분노가 날카롭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최경창·백광훈과 함께 ‘3당(唐) 시인’에 꼽혔던 그의 시풍은 여전히 애상과 아취다.

이곳에서 5년여 수행 끝에 시풍을 혁신한 그는 호까지 손곡으로 바꾼 뒤, 강릉의 명문세가 허엽 집안의 가정교사로 들어간다. 그곳에서 가르친 이가 허균·허난설헌 남매. 장차 무능하고 부패한 왕조를 뒤엎으려다 극형에 처해진 조선의 풍운아 허균, 가부장제의 억압 속에서 세상과 불화하다가 스물일곱에 요절한 당대 최고의 여성시인 난설헌. 허균이 ‘홍길동’을 스승 손곡을 모델로 창조했다 하니, 그로써 이달의 이상과 꿈을 짐작할 만하다. 꿈이란 얼마나 위험하고 또 허망한가. 스승과 제자 모두 불운했다.

원주의 광대패 모두골 네 가족이 호저면 광격리 영산마을로 귀촌한 것은 1998년. 그해 말 서울 한신대 목회자 모임에서 돌아온 광대패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상쇠가 봉투 하나를 꺼냈다. 사례비 70만원. ‘대호네는 네 식구이니 얼마, 바우네는 세 식구이니 얼마…’ 그는 이런 식으로 나눴다. 상쇠의 눈에서 이미 맺혔던 눈물이 주르륵 쏟아졌다. 가족들이 뒤엉켜 흐느꼈고, 통곡했다. 몇 푼 안 됐지만, 광대패를 전업으로 삼은 뒤 처음으로 가족에게 쥐여준 돈이었다.

지학순 주교와 장일순 선생이 버티고 있던 원주는, 여느 지방과 달리 일찌감치 민주화운동의 성채를 이루고, 살림과 모심을 통한 새로운 삶을 시도했다. 경향 각지에서 몰려온 젊은이들이 생협·신협 등 협동조합 운동을 펼쳤고, 탈춤이나 판소리, 대동굿의 복원을 통해 공동체의 회복을 시도했다. 그때 원주 민속연구회에서 활동하던 청년들이 통일문화연구회, 광대패 골굿떼를 거쳐 결성한 것이 광대패 모두골이었다. 1993년의 일이었다.

전업 예인으로 살기로 했지만, 연습장조차 꿈도 꿀 수 없는 소도시에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너나없이 귀촌을 생각했다. 먹을 것은 함께 씨 뿌려 가꾸고, 비닐하우스 속에서 연습하고 창작하면 될 것 아닌가. 그래서 찾아간 곳이 영산마을. 다행히 곳곳에서 공연 혹은 연희 요청이 왔다. 자리를 잡는가 싶었는데, 2001년 지주가 나타났다. 어쩌겠는가 떠나야지.

마침 손곡리 주민들이 이들에게 마을 행사 기획과 연희를 맡겼다. 그야말로 주민들과 손님들이 ‘뿅’ 가게 놀았다. 그랬더니 집이건 공연장이건 땅이건 필요한 것 마련해줄 테니 손곡으로 오라는 제안이 왔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공연장 ‘이달의 꿈’은 그렇게 해서 탄생했고, 몇 해 뒤 공동체 ‘신화마을’ 실험이 시작됐다.

허균은 <손곡산인전>에서 스승을 이렇게 그렸다. ‘손곡산인(蓀谷山人) 이달(李達)은 자가 익지(益之)이다. 고려 말 이첨의 후손으로서 귀족의 신분이지만, 모친이 기생이었으므로 세상에 나와 등용되지 못하고 원주의 손곡리에 살았다. … 그의 마음은 항상 텅 비어 한계가 없었으며,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아 언제나 가난했다. 이 때문에 평생을 떠돌아다니며 걸식하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천하게 여겼다. … 그의 몸은 곤궁했지만, 그의 시는 영원할 것이니, 어찌 한때의 부귀로써 그 이름을 바꾸겠는가?’ 이달은 저의 신세를 단 네 문장으로 그렸다. “외로운 학 먼 허공 바라보며/ 차가운 밤 외발로 서 있네./ 가을바람 대숲에서 싸늘하게 우는데/ 온몸이 찬 이슬에 젖어 있네.”(‘畵鶴’ 전문) 그 스승에 그 제자다.

뜻이 높으면 세상과 불화할 수밖에 없고, 꿈이 크면 세상의 배척을 피할 수 없다. 알산골, 능골, 뒷골, 은골, 오리올, 어재골 등 손곡의 골곡엔 큰 뜻을 가진 이들의 설화가 살아 있다. 알산골엔 반역의 피를 어쩌지 못하던 이괄의 탄생 설화가 있고, 능골엔 위대한 무장이었지만 정치꾼들의 농간에 놀아나 버림받은 임경업 장군의 설화가 있다. 이괄은 인조반정의 일등공신이었지만, 인조에 맞서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가 효수된다. 임경업은 청군을 벌벌 떨게 했지만 그가 지키려던 조정의 배반으로 만리타향에서 죽임을 당했다. 공교롭게도 이괄의 난을 진압한 것은 임경업이었으니, 손곡 마을의 운명 또한 기박하다. 미륵세상을 꿈꾸던 궁예가 왕건에게 대패해 그 꿈을 꺾은 곳도 문막과 부론 들판 어디쯤이라던가.

손곡에서 광대패 모두골은 거침없었다. 정월 대보름 달맞이굿, 섣달그믐 서낭당제 등 각종 대동굿으로 마을의 일체감을 제고하고 백운산 산신제, 장군굿 등의 제의를 통해 신화적 삶의 복원을 꿈꿨으며 각종 공연과 연희로 이웃 사람들을 불렀다. 청소년에게 풍물을 가르치고, 방과후 공부방 손곡학당도 개설해 위기의 중고교를 구하려 했다. 2009년엔 인근 문막 취병리 진밭마을 김봉준 화백의 도움을 받아, 신화마을 프로젝트에도 나섰다. 스스로 살리고(자립), 서로를 살리고(공생), 신화로써 공동체를 살리자는 기치 아래 생산부터 유통까지, 문화 발굴에서 창조까지 주민들과 함께 하려는 것이었다. 모심의 정신 아래 각자의 영성을 일깨워 사람과 사람, 인간과 자연이 하나 되는 생명의 공동체를 추구했다.

예상은 했다. 그러나 밀월은 오래가지 않았다. 더 빠른 결실을 기대하는 주민들의 재촉이 잦아졌고, 생산과 유통에서 전통적 관행을 바꿔내는 것은 더 힘들었다. 광대들은 전업 예인으로서 커가고 싶었지만, 머슴처럼 동원되다 보니 정체성이 흔들렸다. 하나둘 마음도 몸도 떠났다.

두 장승이 등 돌린 채 먼 산만 쳐다보는 형국이니 신화마을은 위태롭다. 서로 다름보다 지쳤다. 꿈은 깊은 상처가 되었다.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도 비감하다. 손곡, 허균, 이괄, 임경업 그리고 오늘의 광대들. … 성급했던가, 참깨 모가지가 부러지면 안 된다.

공연장 앞에는 생명대장군과 살림여장군이 나란히 있다. 어디서든 장승은 그렇게 둘이 붙어 있다. 신화마을에도 이지원, 정대호 두 장승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둘은 떨어져 있다. 한 사람은 영농조합, 다른 사람은 광대패에만 전념한다. 두 장승이 등 돌린 채 먼 산만 쳐다보는 형국이니 신화마을은 위태롭다. 서로 다름보다 지쳤다. 꿈은 깊은 상처가 되었다. 지켜보는 이들의 마음도 비감하다. 손곡, 허균, 이괄, 임경업 그리고 오늘의 광대들. “~ 아아 손곡리 가는 길은/ 지난겨울의 꿈이 되었나.”(정토의 ‘손곡리 가는 길’에서)

이제 다시 참깨를 털던 할머니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 번만 기분 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었다/ 그걸 가엾게 지켜보시던 할머니가/ 조용히 나무라하셨다/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성급했던가, 참깨 모가지가 부러지면 안 된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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