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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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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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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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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병이 깊었던 소월은 “아아, 꿈에서는 언제나 고향입니다”(시 ‘고향’에서)라고 토로하곤 했다. 윤이상 선생의 병은 더 깊었다. 갈 수 없는 조국을 아예 집으로 옮겨놓으려 했다. 독일의 지인들은 베를린 그의 집을 ‘작은 한국’이라고 했다.
그러나 통영 출신 최정규 시인은 선생의 의도를 한눈에 알아봤다. 마당엔 한반도 모양의 작은 연못이 조성돼 있었다. 그 주위엔 남도에 흔한 대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거실로 들어서면 통영의 명물 소목장이 주인과 객을 맞이했고, 침실 침대 머리맡엔 1960년대 후반 서호에서 강구안까지, 통영의 전경이 담긴 사진이 걸려 있었다. 유년의 기억이 오롯이 담긴 사진이었다. 평양 강서고분의 사신도를 제외하고 거실엔 고향의 정취가 물씬한 공예품들이 즐비했다. 선생은 대문을 들어서면 한반도로, 현관문을 들어서면 통영으로, 그리고 침실문을 열면 고향 집으로 들어서게 한 것이었다. 집 안에선 가족들에게 한국어만 쓰도록 했다. 통영과는 생면부지인 딸이, 아버지의 사투리만 따라 배우다 보니 통영 원어민이 된 것은 그 덕분이었다.
기억 속 고향의 정경은, 통영 나전칠기에 박힌 자개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것이었다. “맑은 별 하늘 아래 어부들 노랫소리가 배에서 배로 흐릅니다. 아침이면 어시장의 좁은 길에서 수천의 은빛 고기가 바구니 속에서 웅성대고, 때로는 은빛을 뿌리며 높이 날아올라 길바닥으로 튀어나왔습니다.” 언젠가는 통영과 쓰시마섬(대마도) 사이 공해상 어딘가에서 서성이며 ‘만선으로 돌아오는 어부들의 아련한 뱃노래, 어머니와 부르던 민요 가락…’ 환청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새벽 바다를 삐걱대며 멀어지는 목선, 저녁에 돌아오는 어부들의 노랫소리, 물결 위로 스치는 바람, 밤마다 밤하늘의 별들에서 들려오는 신비한 우주의 소리….”
뱃노래, 들소리, 무가, 범종과 목탁 소리, 파도 소리 그리고 쏟아지는 별빛과 밤바다의 정적. 이 모든 것은 그의 음(音)이 되었고, 음은 그의 영혼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음악이 되었다. “나는 일생 동안 목숨을 걸고 가능한 일을 다 할 것이고, 그리고 어느 날 은퇴해 고향으로 돌아가, 그저 조용히 바닷가에 앉아 낚시를 하고 싶습니다. 마음속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그것을 써두려고도 하지 않고 위대한 고요함 속에 내 몸을 맡겨두고 싶습니다.” 그의 비원이었다.
한때 김영삼 정부는 그의 귀향을 용인할 듯했다. 꿈에 부풀었던 선생은 이렇게 외쳤다. “나 돌아가면 고국의 흙에 입 맞추며 말하리라,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건 사술이었다. 30년 전 박정희 정권이 온갖 고문으로 조작한 범죄를 인정하는 반성문을 쓰라고 했다. 가당키라도 한 일인가.
한때 김영삼 정부는 그의 귀향을 용인할 듯했다. 꿈에 부풀었던 선생은 이렇게 외쳤다. “나 돌아가면 고국의 흙에 입 맞추며 말하리라,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건 사술이었다. 30년 전 박정희 정권이 온갖 고문으로 조작한 범죄를 인정하는 반성문을 쓰라고 했다. 가당키라도 한 일인가. 별세 한 해 전의 일이었으니, 그로 말미암은 절망은 선생의 때 이른 죽음을 재촉했을 것이다. “하물며 짐승도 죽을 때는 제집으로 돌아가는데, 인간인 내가 조상이 살았고 그들이 우리에게 물려준 땅에 돌아가지 못하니….” “나의 고국은 이제 북한도 남한도 아닌 독일입니다.” 비원은 원망이 되었다.
엊그제(11월4일)는 그렇게 떠나신 선생의 열여덟번째 기일. “고향 선산 묘지기나 되어/ 남은 생 보내고 싶다던 당신/ 당신의 가슴에 비하면/ 조국의 가슴이란 건 얼마나 작고 옹졸한가.”(유귀자 시인)
#산청군 덕산면
“지리산은 평범한 산이 아니었습니다. 성스러운 곳이었죠. 용처럼 굽이치는 지리산의 능선을 마주 보는 곳에 제가 태어난 집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잉태했을 때 용이 지리산 위를 날고 있는 꿈을 꾸었죠. 그러나 용은 몸부림만 칠 뿐 비상하지 못하고 있었답니다. 용은 깊은 상처를 입고 있었던 거죠.” 선생의 운명은 그렇게 현시됐다. 훗날 그는 알 수 없는 이끌림에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등 강서대묘 사신도를 애타게 찾았다. 1963년 북한 당국의 호의로 사신도를 직접 볼 기회가 생기자 주저하지 않고 평양을 방문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의 날개를 묶어버리는 일이 될 줄이야.
1967년 군사정권은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을 지어내 발표했다. 그는 모진 고문 끝에 간첩단 수괴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검찰은 그에게 사형을 구형했고, 법원은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사형 집행 소리가 또렷이 들리는 옥사에서, 그는 사신도에서 받은 영감을 음보로 옮겼다. ‘이마주’(영상)였다. 용꿈을 꾼 어머니는 그의 나이 16살 때 출산 중 돌아가셨다. 저와 어머니의 비운을 생각하며 지은 곡이 ‘암흑 속에서 노래하다’였다.
#통영 도천동과 서호
“아버지는 종종 밤낚시를 하러 바다로 저를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우리는 잠자코 배 위에 앉아 물고기 헤엄치는 소리, 어부들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였지요. 그 소리는 배에서 배로 이어져 갔습니다. 남도창이라는 침울한 노래였죠. 수면은 울림판이 되어 그 소리를 멀리 전파했습니다.” “갈치잡이가 신통치 않을 때면 어부들은 고요한 바다, 배 위에서 육자배기를 불렀습니다. 그 소리는 내 영혼에 젖어들어, 내 음악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밤낚시는 못하게 했지만, 저는 몰래 혼자 가곤 했습니다. 고기를 잡으려는 게 아니라 오로지 혼자서 여름 밤하늘 무수하게 떨어지는 유성을 바라보기 위해서였습니다. 거기에 있으면 진실로 행복했습니다.” 생가(도천동 157번지)는 서호에서 지척이었다. 누나가 밥쌀을 안치고 갯벌에 나가 캐온 조개로 된장찌개를 끓일 정도의 거리였다고 한다.
“집 옆에는 너른 논이 있었습니다. 봄밤이면 개구리 울음으로 몹시 소란스러웠습니다. 내게 그건 예술적으로 잘 구성된 혼성합창이었습니다. 한 마리가 울면 다른 놈이 화답하고, 셋째가 뒤따르고, 그러면 고음, 중음, 저음의 합창이 됩니다. 돌연 침묵이 이어지다가 다시 그런 과정을 되풀이했습니다. 한낮의 들에선 여인들의 구성진 노래가 이어졌지요.”
생가 터는 오래전 소방도로로 바뀌었다. 갯벌은 매립돼 사라졌다. 148번지에 윤이상기념공원이 지어졌으나, 통영시는 ‘윤이상’을 지우고 도천테마공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시내버스 정류장 명칭만 ‘윤이상기념관’이다. 그 앞 너저분한 왕복 2차로 길을 ‘윤이상의 거리’라 이름했지만, 표지석 하나 없다.
#통영 당동
“굿은 바닷가에서도 있었지만, 당집에서 주로 열렸습니다. 바다에 빠져 죽은 선원들의 원혼을 위로하거나, 풍어와 안녕을 기원하는 주술이었죠. 무당은 아름답고 화려한 의상을 차려입고, 화장을 하고, 장신구를 달고, 뜰에 만들어진 작은 무대에서 주술을 했습니다. 3일 낮 3일 밤을 계속하는 경우도 있었죠. 춤도 좋았지만, 내게는 서정적인 노래, 주문, 기도 등이 더 인상적이었습니다.” 굿의 정경을 현대음악으로 옮긴 것이 ‘나모’(南無)다. 당동엔 몇몇 당집만 남았다.
#통영 미륵산, 용화사와 미래사
“(부처님 오신 날 무렵이면) 미륵산 기슭 절 주변엔 수천 수만의 등불이 걸립니다. 사원 경내와 사찰 주변 길을 따라 불을 밝히지요. 사람들은 잠도 자지 않고 밤새 기도하며 등불 밑을 거닐었습니다. 대웅전에선 승려들의 독경 소리가 흘러나오고, 경내에선 신자들이 염불을 합창하고….” “통영의 봄은 복숭아와 벚나무 등 천지가 꽃바다를 이룹니다. 5월 단옷날이면 마을 주민들이 아름답게 차려입고 단오 잔치에 나갔죠. 허리에 꽃을 꽂고, 머리에 모래시계처럼 생긴 소고를 메고, 북도 치고 노래도 하면서, 꽃길을 지나 절로 갔지요. 한잔 걸친 어른들의 흥얼거리는 소리와 덩실대는 춤….” 미륵산 정상 너머엔 선생의 영정이 안치된 미래사가 있다.
“무성영화 시절이었죠. 무성영화 막간엔 휴식시간이 있고, 그때마다 악단이 나와 음악을 연주했죠. 어느 날 아주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그건 제가 몇 가지 악기를 위해 생각나는 대로 작곡한 것인데, 어떻게 악단에 흘러들어갔던 것입니다.”
#통영 세병관
“아버지는 취학연령이 지나서야 저를 신식 학교에 보냈죠. 거기서 처음으로 오르간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렇게 큰 소리가 이렇게 많이 그리고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놀랐습니다. 학교가 있던 곳이 바로 세병관입니다. 조선 삼도수군통제사 본영의 객사였죠.” 세병관 밑엔 봉래극장이 있었다. “무성영화 시절이었죠. 무성영화 막간엔 휴식시간이 있고, 그때마다 악단이 나와 음악을 연주했죠. 어느 날 아주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그건 제가 몇 가지 악기를 위해 생각나는 대로 작곡한 것인데, 어떻게 악단에 흘러들어갔던 것입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다음 회에 윤이상 ②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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