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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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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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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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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브루클린 음악당 로비 벽면에는 위대한 예술가 44명의 이름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이 중 20세기 음악가는 조지 거슈윈, 벨러 버르토크, 이고리 스트라빈스키, 윤이상 넷뿐이다. 생전 ‘유럽의 현존하는 5대 작곡가’에 꼽혔고, 세계를 통틀어 10명 이내인 국제현대음악협회의 명예회원이었다. 그런 그의 음악적 원형질은 유년기 통영의 소리였으며, 고통의 현대사는 그의 음악세계를 떠받치는 골조였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단언했다. “정치가는 음악을 할 수 없지만, 음악가는 정치를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삶과 정신, 나의 예술은 정의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1944년 몇몇 친구와 무장투쟁을 모의한다. “가까운 섬에 원시적인 지하 군수공장을 건설하고, 사격 훈련 및 폭탄 폭파 실험에 필요한 준비를 했지요. 한 동료가 부주의로 체포되면서 미수에 그쳤습니다. 거제도에서 체포돼 온갖 고문을 당했죠. 통나무로 정강이뼈를 으깨기도 했습니다만 실토하지 않았죠.”
#통영 경찰서
1944년 몇몇 친구와 무장투쟁을 모의한다. “가까운 섬에 원시적인 지하 군수공장을 건설하고, 사격 훈련 및 폭탄 폭파 실험에 필요한 준비를 했지요. 한 동료가 부주의로 체포되면서 미수에 그쳤습니다. 거제도에서 체포돼 온갖 고문을 당했죠. 통나무로 정강이뼈를 으깨기도 했습니다만 실토하지 않았죠. 그래서 경찰은 나의 조선 가곡만 문제 삼아 2개월간 붙잡아 두었습니다.”
“석방 뒤 다시 삼천포의 미곡 창고에 배치됐습니다만 또다시 체포를 피해 진주와 밀양을 거쳐, 대구로 피신해 석탄공장에 숨었다가 서울로 도피해야 했습니다. 어떤 면서기의 도움으로 가짜 주민증을 얻어 체포를 피하고, 식량 배급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도피생활 내내 그는 첼로를 지니고 다녔다. 첼로야말로 그의 유일한 벗이고 분신이었다. 그는 훗날(1975년) ‘첼로 협주곡’을 작곡한다. “그분을 가두고 고문하고 죽이려 했던 세상에 대해 ‘그건 아니다’라며 맞서던 몸부림을 그린 것이 대표작 ‘첼로 협주곡’이었죠.”(부인 이수자)
# 서울 서울대병원
서울에서 인쇄소 필경사 자리를 얻어 굶주림은 면했다. 그러나 극심한 영양실조 때문에 그의 몸은 엉망이었다. “오후가 되면 항상 열이 나고, 몸이 늘어졌습니다. 견딜 수 없어 경성제대 병원엘 찾아갔지요. 마침 친절한 의사를 만나 입원할 수 있었습니다. 결핵균이 늑막 깊숙이 침투해 있었죠. 3주쯤 누워 있었나 싶은데, 천황의 항복 문서 낭독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들렸습니다.” 다음날 그는 바로 귀향했다.
#서울 성북동
1953년 가을, 부산고등학교 교사직을 그만두고 상경했다. “돈이 없어 오빠가 결혼 선물로 사준 피아노를 팔았죠. 피아노는 당시 매우 귀한 물건이어서, 그것만으로 성북동에 집 한 칸 마련할 수 있었죠. 개울 건너엔 조지훈 시인이 살고 있었고, 계곡 꼭대기엔 김환기 화백이 살았죠. 그 인연으로 ‘작사 조지훈, 작곡 윤이상’의 고려대 교가가 탄생했죠.”(이수자) 1955년 당시 예술분야에서 최고의 영예였던 서울문화상을 작곡가로서는 처음으로 수상한다. 목돈이 생기자 이듬해 다시 유럽으로 유학을 떠난다.
#남산 지하실
11년 뒤 그는 고국에 돌아온다. 1967년 6월17일이었다. 못내 그리웠던 조국에서 그가 들어간 곳은 중앙정보부 남산분실이었으며, 그가 마주친 것은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24시간 빛나는 백열등 그리고 고문 집행자와 고문 도구였다.
#서대문 형무소
절망 속에서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지만, 덕택에 작곡을 할 수 있는 허가를 받는다. “사형을 예감하며, 저는 물 사발이 얼어붙는 혹한 속에서 손을 불어 가며 음보를 적어 나갔습니다. 나의 생명을 유지하는 정신적 위안은 ‘음악’을 생각하고 찾는 것뿐이었습니다. 현실로부터 해방되고 꿈과 환상으로부터 자유를 찾아내고 위안을 얻어내는 것이었지요. 나는 그곳에서 인간정신의 숭고함과 절대적 순수, 꿈과 이상의 화합을 생각했습니다. 그곳에서 탄생한 것이 ‘이마주’(영상)와 함께 대표작 ‘나비의 미망인’과 ‘율’이었습니다.”
#수자의 선물
“9월 50살 생일을 맞아, 같은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아내 면회를 신청했습니다. 그러마고 했던 당국이 당일이 되자 선물 하나만 전해줬습니다. 머리카락으로 만든 장미꽃이었습니다. 아…, 그건 내 생애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면회 신청이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슨 선물을 할까 고민했습니다. 운동 시간에 나팔꽃을 보았습니다. 꽃을 하기로 했지만, 꽃을 꺾을 순 없었습니다. 그래서 머리카락을 잘랐지요.”(이수자)
#서울 국립극장
1969년 형집행정지로 독일로 돌아간 그는 뮌헨올림픽조직위로부터 의뢰를 받아 오페라 ‘심청’을 작곡한다. ‘심청’ 공연은 33번의 커튼콜을 받았다. 박정희 정권은 이번엔 1973년 국립극장 개관 무대에 ‘심청’을 올려달라고 ‘정중하게’ 부탁한다. 그는 수락한다. “원한보다는 망향의 정,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컸습니다. …조상의 묘를 지키는 건 장남 몫인데, 이에 대한 죄책감도 컸습니다.” 그러나 김대중씨 납치 사건이 터지면서 귀향을 포기했다.
#부산 대원리 고아원
해방과 함께 귀향한 윤이상은 통영문화협회를 결성해 활동하다 이듬해 부산으로 간다. 일본에서 무더기로 실려온 조선인 고아들을 돕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작은 섬에 아이들을 위한 낙원을 세우는 꿈을 꾸곤 했다. 버려진 학교에서 아이들 먹이고, 씻기고, 가르쳤다. 경비는 미군이 원조해준 과자를 팔아 마련했다. “그때 나는 가장 행복했습니다.” 고아원은 범일동에서 수영으로 가는 중간 어디쯤, 지금은 지명에서 사라진 대원리에 있었다.
#부산사범학교 시절
잠시 귀향해 통영여중 교사를 하다가 다시 부산사범학교로 옮긴다. 첫 가곡집 <달무리>가 출간됐다. 그러나 결핵이 도져 쓰러진다. 다행히 3개월 만에 복귀할 수 있었고 돌아오니 새내기 국어 선생이 와 있었다.
“일요 당직이어서 학교에 나왔더니, 윤 선생도 작곡하러 오셨더군요. 점심때 혼자 먹기 마음에 걸려 두 그릇을 시켰죠. 퇴근 무렵 윤 선생이 저녁은 자기가 사겠노라고 했습니다. 제 밥 반 그릇까지 뚝딱 치우는 게 인상적이었지만, 그에겐 돈이 한푼도 없었죠. 마침 보름이었습니다. 전차 종점까지 함께 걸었습니다. 한 창고 담장에 기대어 달을 바라보고 있자니, 소월의 시 한편을 암송했습니다.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저도 제 마음이 흔들리는 걸 그때는 몰랐죠. 동대신동 종점에서 전차를 타고 오면서 선생은 제 머리에 붙어 있던 검불을 떼어 주었습니다. 그때 느꼈죠. 운명처럼 그가 내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걸.”(이수자) 그 후 수자는 학교를 그만뒀고, 두 사람은 일주일에 한번씩 작천동에서 범일동을 거쳐 대원리까지 오로지 걷기만 하는 데이트를 한다.
“순결한 여인. 순백한 백지처럼 무엇이든 아름답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 내게 건강을 가져다주는 사람. 쌀이 없고 돈이 없어도 당신만 있으면 나는 살 수 있습니다.”(윤이상)
윤이상은 부산고등학교로 옮긴다. 해방 직후부터 1949년까지 4년여 동안 그는 ‘교가 지어주기’ 운동을 벌이며 부산고 교가를 비롯해 고려대, 통영고, 마산고 교가 등 모두 19곡을 작곡했다.
“나의 음악은 역사적으로는 나의 조국의 모든 예술적, 철학적, 미학적 전통에서 생겼고, 사회적으로는 나의 조국의 불행한 운명과 민족, 민권 질서의 파괴, 국가권력의 횡포에 자극을 받아, 음악이 가져야 할 격조와 순도의 한계 안에서 가능한 최대의 표현적 언어를 구사하려 노력한 것입니다.”
#에필로그
1980년 광주의 비극을 듣고 이듬해 ‘광주여 영원하라’를 작곡한다. 1994년, 민주화의 좌절에 절망한 학생들의 잇따른 분신 소식을 듣고는 '화염에 휩싸인 천사'를 헌정한다. 그리고 삶의 ‘맺는말’과도 같은 <에필로그>를 작곡한다. 이듬해 11월4일(독일시간 11월3일) 독일 베를린 자택에서 영면한다. 서울 봉은사와 팔공산 은해사에선 끝내 돌아오지 못한 그를 위해 49재를 봉행했다.
“나의 음악은 역사적으로는 나의 조국의 모든 예술적, 철학적, 미학적 전통에서 생겼고, 사회적으로는 나의 조국의 불행한 운명과 민족, 민권 질서의 파괴, 국가권력의 횡포에 자극을 받아, 음악이 가져야 할 격조와 순도의 한계 안에서 가능한 최대의 표현적 언어를 구사하려 노력한 것입니다.” 윤이상기념관에 안치된 선생의 흉상 받침에 새겨진 글이다. 지금도 그는 돌아오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세상의 돌아가지 못하는 이들의 아픔을 달래준다. 이념의 감옥, 정치의 사술에서 그의 예술이 언제나 풀려날까. 여기 지면을 상석 삼고, 자취들을 제수 삼아, 기억의 향불을 사른다. 흠향하소서. 그리움 달래소서.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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