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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2.31 18:49 수정 : 2013.12.31 18:49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곽병찬 대기자
“1960년 4월26일 낮기도 양심성찰 기간이었습니다. 가톨릭대학교(당시 대신학교) 학장 신부님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전해주시며 강론을 했습니다.” 함세웅 신부의 회고다. “이제 비로소 우리는 자유를 찾았습니다. 이 자유는 경무대 앞에서 경찰의 총에 스러져간 어린 학생, 청년, 시민들의 피의 대가입니다. … 자신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를 가져다준 이분들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불사조입니다.” 이집트 불사조 신화를 소개하며 순교의 의미를 강론한 이는 4대 전주교구장을 역임한 한공렬 주교였다.

5대 전주교구장 김재덕 주교는 1979년 9월10일 시국미사를 집전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직무집행 정지 가처분을 주장했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직무 정지를 당한 사실을 상기시키며, “직무 정지를 당해야 할 사람은 김 총재가 아니라 박정희”라고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5대 전주교구장 김재덕 주교는 1979년 9월10일 시국미사를 집전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직무집행 정지 가처분을 주장했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직무 정지를 당한 사실을 상기시키며, “직무 정지를 당해야 할 사람은 김 총재가 아니라 박정희”라고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무사할 리 없었다. 박 정권은 김 주교를 13일 구속하기로 하고, 이를 교황청 대사, 김수환 추기경 등에게 미리 통보했다.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들이 즉각 서울로 집결하자, 박 정권은 12일 꼬리를 내렸다. 34년 뒤 박근혜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하는 첫 시국성명이 다시 그곳에서 나왔다. 개신교, 불교, 원불교, 천도교 등 전체 종교계와 시민사회가 그 뒤를 따랐다.

시작은 그곳에서 이루어지곤 했다.

광주학살을 입에 담을 수조차 없었던 시절, 전주교구는 그 진실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다. 광주를 탈출한 김현장씨로부터 광주의 비극을 전해들은 김 주교는 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차원에서 김씨가 작성한 ‘전두환의 광주 살육작전’ 문건을 1만장 복사해 서울, 부산, 대구 등으로 보내도록 했다. 고산성당 문규현 신부는 유닛 앰프를 종탑에 걸어놓고 광주학살을 방송했다. 여산성당 박창신 신부는 5월21일부터 보름간 금마, 마전, 신도리 등 모든 공소를 돌아다니며 광주의 참상을 전했다. 6월25일 박 신부는 괴한 4명으로부터 칼과 쇠파이프로 테러를 당했다. 그로 말미암아 하반신 마비를 겪었고, 지금도 걸음걸이가 불편하다. 5월23일 희생자 위령미사가 처음으로 전주교구에서 열렸다.

박종상 신부는 1978년 7월 경찰 기동타격대에 붙잡혀 처절하게 구타를 당한 뒤 도로변에 버려졌다. 문정현, 리수현, 김진화 신부 등 전주교구 신부들도 한두번씩 당했다. 한국 천주교의 성지인 전주 전동성당을 비롯해 군산 오룡동 성당 등은 방화의 피해를 입었고, 전주 파티마 성당, 익산 창인동 성당은 경찰에 침탈당했다. 박종철씨 고문치사 사건이 알려지자 교구 사제단은 단식기도에 들어갔고, 임수경씨 방북 때 북한으로 건너가 임씨와 함께 휴전선을 넘어온 것도 전주교구사제단 문규현 신부였다. 도대체 두려움을 모르는 전주교구 신부님들, 공권력은 오히려 그들이 무섭다.

일제는 전주부 성을 헐면서, 풍남문만 남겼다. 그 아름다움과 격조를 밀어버리기엔 스스로도 부끄러웠나 보다. 풍남문에서 500m쯤 떨어진 곳에 경기전이 있다. 조선의 건국자 이성계의 어진이 있는, 조선의 탯자리와도 같은 곳. 풍남문과 경기전 중간쯤에 전동성당이 있다. 비잔틴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을 혼합한,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 가운데 하나다.

윤지충과 사촌 권상연은 1791년 모친의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웠다. 그들은 풍남문 밖 이곳 전동성당 자리에서 참수당한다. 조선의 첫 순교자였다. 10년 뒤 신유사옥 때 다시 유항검 등 수십명이 그곳에서 육시 혹은 참수를 당한다. 그 머리는 풍남문 문루에 내걸렸다. 숲정이, 서천교, 초록바위 등 전주 인근엔 널린 게 순교지다. 여산 옛 동헌엔 천주쟁이를 돌 위에 눕히고 얼굴에 한지를 씌우고 물을 천천히 부어 질식사시키는, 이른바 백지사 터도 있다. 신유사옥 때 전국에서 처형당한 천주교인은 500여명. 이 가운데 전주 인근만 200여명이 희생됐다.

그로부터 100여년 뒤 신자들은 전주부 성의 돌로 주춧돌을 삼고, 성곽 흙으로 벽돌을 구워 쌓아올렸다. 6년간의 공사 끝에 전동성당은 완공됐다. 그 아름다움을 찬탄하기에 앞서 등이 서늘하다. 전동성당은 순교자의 피와 뼈로 쌓아 올린 것이었다.

이제 조선의 정신(혹은 신앙)을 지키려던 경기전과 거기에 천주교인들의 성지 전동성당은 2차선 좁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경기전, 전주객사, 오목정, 한옥마을, 전동성당, 풍남문 등이 몰려 있는 이곳 전주 답사 1번지를 찾는 이들은, 순교지 앞 풍남정이나 풍남문 밖 남문시장에서 비빔밥 혹은 콩나물국밥으로 허기를 달랜다. 피순대를 안주 삼아 목을 축이기도 한다.

전동성당을 출발해 완주 김제 익산을 거쳐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 장장 240㎞의 순례길. 그것이 전북에서만 가능했던 건 이런 역사적 뿌리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태현 신부는 이런 의문 때문에 고민했다. 박해 100년 동안 무려 1만2000~1만3000명의 천주교인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렸다. 도대체 그 믿음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순교병이라도 걸렸던 것일까.(‘순교자들의 성서적 삶’)

치명자(순교자의 옛말) 산을 오르노라면 그 의문은 더 커진다. 산 정상엔 천주교 역사상 첫 동정 부부였던 이순이 루갈다와 유중철 요한 그리고 그의 가족 5명 등이 합장돼 있다. 신앙을 포기하면 살려주겠다는데도, 빨리 죽여줄 것을 간청한 이들. 때로 맹신과 독선으로 흐르기 쉬운 게 신앙인데…. 그러나 루갈다는 누구보다 전통적 가치와 덕에 충실한 이였다. 시부모는 그런 며느리를 딸처럼 아꼈다. 루갈다에겐 그 뜻을 받들어 따를 대상이 더 있었다. 만물의 근원이라고 믿는 천주. 하지만 그의 나라는 영생복락을 누리는 그런 곳이 아니라, 차별과 억압, 부조리와 불의가 없는 곳이었다.

“저희 두 사람은 약속했습니다. 부모님께서 재산과 가업을 물려주시면, 재산을 서너몫으로 나누어서 한몫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또 한몫은 시동생에게 주어 시부모님을 모시도록 하고….”(<루갈다의 옥중편지>) 불공정하고 불의한 현실 속에서 그들은 하늘의 공정과 정의에 기대려 했고, 그 뜻에 따르려 했다. 기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보두네 전주성당 주임신부는 1884년 4월, 장수 양악 교우촌을 방문했다. “진실로 감탄스러운 것은 서로 베푸는 사랑과 정성이었습니다. 빈부나 신분 차별 없이 없는 재물을 나누며 살아갑니다. 이곳에선 마치 초대 그리스도 교회에 와 있는 것 같기만 합니다.” 달레 신부의 기록(<한국천주교회사>)도 비슷하다. “모든 이가 가난 속에서도 없는 형제에게 도움을 주고, 과부 고아를 거두어주니, 이 불쌍한 시절보다 우애가 깊었던 일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요한 오라버니에게 향하는 저의 정은 죽음을 앞둔 지금까지도 잊지 못합니다. 제가 가장 마음으로 복종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요한 오라버니입니다. 오라버니는 이 세상에서 저를 위한 마음이 지극하였으니, 하늘에서도 제가 고통에 못 이겨 남몰래 오라버니를 부르는 제 목소리가 귓가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에요.”(루갈다) 참수당한 요한의 유품엔 이런 편지가 있었다.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위로합니다. 누이여,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

“이미 환하게 밝혀진 진실을 그릇이나 침상 밑에 둘 수는 없다. … 불의에 대한 저항은 우리 믿음의 맥박과 같은 것이다. 시련은 교회의 영혼을 정화하고 내적으로 단련시켜준다. 늘 그랬듯이 우리는 가시밭길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그것은 기쁨이며 당위다.”

“이미 환하게 밝혀진 진실을 그릇이나 침상 밑에 둘 수는 없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났다(루카복음 8장16~17절). … 진실을 요구하는 수많은 국민들의 요구를 묵살하는 대통령은 이미 대한민국 국민이 선택한 대통령이 아니다.”(11월22일 전주교구 사제단 시국성명) “불의에 대한 저항은 우리 믿음의 맥박과 같은 것이다. 시련은 교회의 영혼을 정화하고 내적으로 단련시켜준다. 늘 그랬듯이 우리는 가시밭길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그것은 기쁨이며 당위다.”(12월4일, 전국사제단 성명)

신화 속 불사조는 죽지 않는 새가 아니다. 오히려 반드시 죽어야 다시 사는 새다. 때가 이르면 자신의 둥지에 향기로운 나뭇가지들을 모아놓고, 스스로를 불태운다. 잿더미 속에서 알 하나가 탄생하고, 알에서 새 생명이 부화한다. 찬란한 자태를 뽐내지 않는다. 필요할 때만 나타나 도움을 주고 홀연히 사라진다. 해가 뜨는 아침이면 아름다운 지저귐으로 자신을 알릴 뿐이다. 불사조, 죽어서 다시 사는 새. 자신을 던져 의를 실현하려는 사제들이 꿈꾸는 신앙의 상징.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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