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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1.28 19:28 수정 : 2014.01.28 20:41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곽병찬 대기자

민영화 얘기도 있지만 누가 적자 노선을 인수할까. 폐로를 걱정하는 까닭이다. 정선군이 2008년 운영권을 인수하겠다고 했을 때 코레일은 군외영업료 11.5% 등 수용하기 힘든 조건을 내걸었다. 협상은 결렬됐다. 앞서 코레일은 2006년 함백 역사를 시작으로 정선의 역사들을 폐쇄하기 시작했다.

치매 걸린 할머니는 오늘도 고운 한복 차려입고 역으로 나간다. 대합실 나무의자에 앉아 쪽찐 머리 매만지며, 할아버지가 타고 돌아오신다는 기차를 기다린다. 기차는 매번 허망하게 오고 가지만, 그럴수록 할머니의 기억 속엔 할아버지의 아름다운 기억만 침전된다. 실제 할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할머니를 떠났다.

영화 <봄날은 간다>의 할머니가 기다리던 역은 수색역. 그러나 정선선을 타보면 안다. 기다림의 역이란 모름지기 어떠해야 하는지. 민둥산역을 출발한 기차는 곧 긴 터널을 지난다. 가파른 산기슭을 따라 협곡을 통과하면 한 뺨 정도의 하늘이 드러나고, 역사 하나가 나타난다. 별어곡, 이별하는 계곡이라는 뜻의 역사. 지금은 기차가 서지도 않는 추억의 역사이지만, 오래지 않은 옛날 그곳은 수많은 이들이 떠나고, 떠나보내던 곳이었다. 오죽했으면 소설가 임철우는 소설 <이별하는 골짜기>를 썼을까. 소설 속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할머니는, 밑도 끝도 없이 기차표를 달라고 역무원을 졸랐던가.

별어곡 어딘가는 영화 <봄날…>의 촬영지이기도 했다. 해발 1119m 민둥산 산정은 온통 억새밭. 그곳에서 상우는 바람에 수수대는 억새 소리를 녹음했다. 동행한 은수와 사랑이 싹튼 곳도 거기였다. 그러나 떠나가버린 은수. 힘들어하는 손자에게 할머니는 잠깐 정신이 돌아오면 “떠나간 여자와 버스는 기다리는 게 아니야”라고 달랜다. 그 오랜 기다림 때문이었을까. 눈부신 상고대로 민둥산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

설사 그 이름이 이별하는 골짜기가 아니었어도, 정선선 역사들에는 별리의 사연이 깨알처럼 촘촘하고, 철길과 나란히 흐르는 계곡은 이별의 눈물로 마를 날이 없었다. 정선 땅에 들어선 <택리지>의 기자 이중환은 ‘무릇 나흘 동안 걸었는데도 하늘과 해를 볼 수 없었다’고 한탄했다. 해발 1000m 이상의 산만 22개요, 물길만 해도 송천 골지천 오대천 조양천 동강 등 헤아리기 힘들다. 그런 산과 물을 넘고 건너 그곳까지 왔다면, 거기엔 필시 무슨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한때 12만명에 이르던 주민이 이제 4만명으로 줄었다면 거기에도 역시 무슨 까닭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노래한 것이 정선아리랑이요, 그 까닭을 가슴에 새긴 것이 역사이며, 그런 사연을 실어나른 것이 정선선 기차였다. 정선아리랑의 느리고 긴 메나리조 가락이나, 역시 느리고 긴 기차의 기적소리가 까닭 없이 구슬픈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고려 유신 7인이 그곳에서 개경의 만수산 그리는 마음을 담은 것이 아리랑의 시초라는 것에는 이론이 많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부터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이곳으로 흘러흘러 왔다는 건 의심할 수 없다. 열 스무 개의 터널을 지나고, 열 스무 개의 깎아지른 협곡을 통과할 때, 그리고 고개를 젖혀야 하늘을 볼 수 있는 그곳에 도착했을 때 그 마음이 어떠했을까. 일찍이 찾아온 이들은 초입의 함백, 사북, 고한에 자리잡았고, 뒤에 온 이들은 자미원 나전을 지나 구절리까지 들어가야 했다. 탄광촌, 그곳에서 검은 밥 먹고, 검은 눈물 흘렸다.

하긴 그건 아주 오래전, 떼돈을 기대하며 한양 1200리 길을, 나무로 떼를 엮어 실어 나르던 떼꾼들이 감당했던 애환이다. “황새여울 된꼬까리 떼 무사히 지났으니, 만지산 전산옥이야 술상 차려 놓게, 해도 가고 달도 가고 월선이도 가는데, 그대 님은 누구를 볼라고 뒤처져 있나.”

별어곡을 떠난 기차가 터널과 협곡을 비집고 드나들기 몇 차례, 돌연 들이 펼쳐진다. 평야라고 할 수는 없어도 툭 트인 시야가 반갑다. 오죽 들이 귀했으면 심산유곡에서나 노닌다는 신선 선녀가 정선 땅에선 들에서 놀고 갈까, 선평이다. 서쪽으로 멀리 병방치가 있다.

그걸 막은 건 주민들이었다. 부숴버린 함백 역사를 오로지 주민 힘으로 옛 모습 그대로 복원했고, 별어곡 선평 나전 역사 등을 남겨두게 했다. “거기에 어떤 추억 어떤 사연 어떤 눈물이 담겨 있는데 그걸 함부로 부수고 뜯어냅니까. 그건 우리 삶의 역사 그 자체입니다.”

산골 어디나 그렇듯 오일장에라도 나와야 돈도 만지고 소금 생선 고무신 따위도 마련할 수 있다. 귤암리 사람들이 장 보려면 반드시 넘어야 했던 고개, 하도 높아 뱅뱅 돌아 오르고 내린다 하여 병방치라 이름한 고개다. 나전의 반점재, 조동리의 새비재도 그렇게 눈물 콧물 진을 다 빼는 고개였다. 기차로 말미암아 그 고개를 넘지 않아도 됐으니, 철길은 하늘의 축복이었다. 정선선이 놓이고부터 그곳 삶은 온전히 기차와 함께한 세월이었다.

장날이면 사북 고한 함백 석항 증산 예미 별어곡 선평 사람들은 정선읍으로 올라갔고, 구절리 여량 나전 송석 사람들은 내려왔다. 쌀 보리 옥수수 조 팥 콩 감자 고구마 등 곡식과 곤드레 취 고사리 고비 엄나무순 두릅 따위 산나물, 닭 계란 병아리 강아지 온갖 돈 될 만한 것은 다 기차에 부렸다. 때론 장작까지 실었으니, 그야말로 난장. 발 디딜 틈조차 없었지만, 모처럼 만난 반가운 사람들, 안부 묻고 부모 걱정, 자식 걱정, 농사 걱정 나누다 보면 어느새 정선읍이다. 이제 군민이 12만명에서 4만명으로 줄었으니 스산하기만 한데, 끝자리 2·7일 장날이면 여전히 시끌벅적하다.

바람 불면 펄럭이는 깃발 같다는 들판에 들어선다. 어라전, 행정명으로 나전이다. 검룡소에서 발원한 골지천이 아우라지에서 송천을 만나 몸집을 불리고, 오대천을 만나 조양강이 되는 곳이다. 조양강은 가수리에서 동남천을 만나 동강을 이루고, 한국의 장강삼협이라 불리는 협곡을 굽이쳐 흐른다. 그 위험천만한 곳으로 떠나야 했고, 또 떠나보내야 했으니 남정네건 여인이건 애간장 다 녹는다. 한탄과 눈물이 씨줄 날줄 되어 짜인 것이 정선아리랑 장장 3천수다. 물길 험난하고 사연 많으니, 사설이 길 수밖에. “산천에 올라서 임 생각을 하니, 풀잎에 매디매디 찬 이슬이 맺혔네. 오시라는 유정님은 왜 아니 오시고, 오지 말라는 궂은비만 줄줄이 오나.”

강은 서로 만나 한바탕 뒹굴고 뒤섞이며 회포를 푼다. 하지만 사람은 만나고 헤어진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는 바람이 불까 봐 염려요, 당신하고 나하고는 정떨어질까 염려네.” 아우라지는 정선선 종착역이지만, 골지천이 송천을 만나 몸집을 불린 그곳은 뗏목이 출발하던 곳. 돌아보면 정선선 47㎞, 철길은 짧지만 삶이란 굽이굽이 깊고도 깊다. 아우라지에서 송천을 따라 오르면 구절리. 비록 쫓기다시피 들어온 곳이지만, 아웅다웅 살다보니 고향이 되었고, 살을 부대끼다 보니 피붙이도 늘었다. 10여년 만에 구절리 골짜기는 대처가 되었다. 초등학교 학생만 1000여명. 아이들은 새처럼 지저귀고, 청년들의 연가가 계류 따라 아우성쳤다. “검은 산 검은 물밑이라도 해당화 피는 곳, 노랑나비 퍼펄펄 날며는 대한에 봄 온 줄 알고, 세살문고리 다달달 거리면 내가 온 줄 알아라.”

스러지는 것도 물거품 같았다. 1980년대 말부터 시작한 석탄산업합리화조치, 구절리를 시작으로 나전, 자미원, 함백, 사북, 고한은 빛바랜 흑백사진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폐광. 수많은 동료들이 갱도 속에 묻힌 곳, 그러나 아내를 맞고 자식을 키운 곳, 이제는 진폐증에 서서히 죽어가는 가슴을 안고 그들은 또다시 정선선에 몸을 싣고 떠나야 했다. 대개는 막 공단이 가동하기 시작한 안산으로 갔다고 한다. 몰려가야 덜 외로우니까.

기차인들 속이 편했을까. 우시장에 팔려나가는 소처럼, 기차도 사람도 뿌, 뿌, 뿌우… 울었을 것이다.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서 지나, 날 버리고 가시는 님은 가고 싶어서 가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이제 정선선이 아리랑 고개로 넘어갈 차롄가. 코레일이 운영을 재검토한다는 적자 노선의 맨 앞줄에 있는 것이 정선선, 경전선 등이다. 민영화 얘기도 있지만 누가 적자 노선을 인수할까. 폐로를 걱정하는 까닭이다. 정선군이 2008년 운영권을 인수하겠다고 했을 때 코레일은 군외영업료 11.5% 등 수용하기 힘든 조건을 내걸었다. 협상은 결렬됐다. 앞서 코레일은 2006년 함백 역사를 시작으로 정선의 역사들을 폐쇄하기 시작했다. 함백 역사가 헐릴 때 별어곡 선평 등 역사엔 철거용 비계가 세워지고 있었다.

그걸 막은 건 주민들이었다. 대처로 나간 이들까지 힘을 합쳐, 부숴버린 함백 역사를 오로지 주민 힘으로 옛 모습 그대로 복원했고, 별어곡 선평 나전 역사 등을 남겨두게 했다. “거기에 어떤 추억 어떤 사연 어떤 눈물이 담겨 있는데 그걸 함부로 부수고 뜯어냅니까. 그건 우리 삶의 역사 그 자체입니다.”(진용선 정선아리랑학교장)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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