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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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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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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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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佛經)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 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신경림 시인은 대학 시절 청계천 중고서점을 뒤지다가 백석의 시집 <사슴>을 발견했다. 시인은 설레는 마음에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시집에 빠졌다. “실린 시는 40편도 안 됐지만, 그 감동은 열 권의 장편소설을 읽은 것보다 더 컸다.” ‘여승’은 그중 한 편. 그걸 읽느라 시인이 밤을 새운 것이 여러 날이었다고 했다. 하긴 시인이 아니어도, ‘여승’은 일순 머릿속을 하얗게 표백해버린다. 단 한 가지 감정, 서러움만 남기고. 불현듯 수당 정정화 선생이 떠올랐다. 연상의 장난이었다. 운명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불가에 귀의한 여인과, 그런 가혹한 운명에 정면으로 맞서 싸운 수당. 설사 여인의 서러움이 백석 시절 일제치하의 여인들 혹은 민중의 보편적인 것이었고, ‘여승’이 그런 서러움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해석하더라도, 여승에서 수당을 연상하는 건 억지 같았다. 그래도 뭔가…. 지난해 서울역사박물관은 기획전 ‘조국으로 가는 길’을 마련했다. 동농 김가진 선생 가족의 독립운동 이야기였다. 중추원 의장을 지낸 대한제국의 대신. 독립협회 창립에 참여하고, 일제하 비밀결사체인 조선민족대동단 총재였고, 74살 나이에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의 울타리가 되었던 동농. 아버지의 뜻을 따라 함께 망명해 임정의 잔심부름부터 국무원 비서까지 임정의 산 역사가 된 성엄 김의한. 말없이 떠난 시아버지와 남편을 따라 홀로 망명해, 임정의 안살림을 도맡다시피 했던 수당. 세 사람, 한 가족의 특별한 독립운동 이야기였다. 그중에서도 특별한 분이 수당이었다. 전시는 1919년 10월 동농과 성엄의 망명과 임정 활동, 1920년 1월 수당의 단독 망명과 상하이 재회로부터 시작해 1946년 성엄과 수당의 귀환까지를 담았다. 동농은 무장독립운동을 추진하던 중 1922년 상하이에서 사실상 기아와 영양실조로 별세한다. 수당은 임정 어른들의 이런 생활고를 덜기 위해 1922년까지 세 차례 국내로 잠입해 자금을 모아 임정 살림에 보탰다. 세 번째 잠입 때는 신의주 건너편 안동(지금의 단둥)에서 검거돼 서울 종로경찰서로 압송됐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와 함께 임정은 상하이에서 쫓겨났고, 1937년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일제의 추격을 피해 난징에서 충칭에 이르는 장정에 올라야 했다. 우닝,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을 거쳐 충칭까지 3년에 걸쳐 5000여㎞를 때론 목선으로, 때론 버스에 실려 이동했다. 바위 같았던 백범조차 ‘기적장강만리풍’이라 했던 피난길이었다. 그 시절 안살림은 수당의 몫이었다. 그러나 그는 대범했다. “중국에는 쑤저우에서 나고 항저우에서 살며 광저우에서 먹고 류저우에서 죽는 게 소원이라는 말이 있다. 쑤저우는 미인으로, 항저우는 풍광으로, 광저우는 요리로 그리고 류저우는 관(棺)으로 유명했다. 나는 상하이 탈출 후 4주를 모두 둘러본 셈이었다.”(수당 <장강일기>) 수당은 1922년 체포되고도 1931년까지 세 차례 더 국내를 오갔다. 5척 단구에 가냘팠던 수당, 그런 여인의 담력에 남정네들은 혀를 내둘렀다. 우천 조완구 선생은 ‘조자룡의 일신이 모두 담(膽), 정정화의 일신 역시 모두 담’이라 하기도 했다. ‘임정의 잔 다르크’라는 애칭은 나절로 우승규 선생이 지었다. 그런 수당을 보고 백범은 이런 휘호를 썼다. “봄바람같이 큰 뜻은 만물을 품고/ 가을 물 같은 문장은 티끌에 물들지 않네.”(春風大雄能容物, 秋水文章不染塵) 수당은 1922년 체포되고도 1931년까지 세 차례 더 국내를 오갔다. 5척 단구에 가냘팠던 수당, 그런 여인의 담력에 남정네들은 혀를 내둘렀다. 우천 조완구 선생은 ‘조자룡의 일신이 모두 담(膽), 정정화의 일신 역시 모두 담’이라 하기도 했다. ‘임정의 잔 다르크’라는 애칭은 나절로 우승규 선생이 지었다. 전시는 1945년 8월15일 일왕 히로히토의 항복 선언 이후 1946년 1월 충칭을 떠나 다시 탈출의 장정 길을 되짚어 상하이를 거쳐 5월 부산항으로 귀환하는 것으로 맺는다. 동농의 유해는 상하이 만국공묘에 남았으니, 가족으로서는 미완의 귀환이었다. 게다가 6·25 때 납북된 성엄은 평양 재북열사릉에 묻혔고, 1991년 작고한 수당은 대전 국립현충원에 묻혔으니, 가족에게 해방은 영원한 이산이었을 뿐이다. 망명 시절 수당에게 조국은 “중원 내륙에 흙바람이 몰아칠 때, 굵은 빗줄기가 천형인 듯 쏟아져 내려 가슴을 갈가리 찢어 놓을 때, 그래서 서글프고, 쓸쓸할 때마다 늘 생각이 사무치던 곳”이었다. 망명 26년 세월은 “결코 평탄치 않은 역경이었지만, 적어도 이상이 세워져 있었고, 목표가 뚜렷했으며, 희망에 차 있던 시기”였다. 그래서 변절, 매국, 부일 등 민족의 가슴에 못을 박는 몹쓸 것들이 종횡무진으로 활개칠 때도 그는 흔들리지 않고 꼿꼿했다. 1·4후퇴 때 수당은 서울에 남는다. 그해 추석을 수당은 종로경찰서 유치장에서 보내야 했다. 부역죄가 뒤집어씌워져 있었다. “(유치장)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내 심정은 갈가리 찢겨나갔다. 왜놈 경찰의 손아귀에 들어갈 때와 부역죄로 동포 경찰관의 손에 끌려 들어갈 때를 견주어 보아 모든 게 너무나 달랐다.” 그러나 사무치게 그리웠던 조국은 그에게서 사랑하고 존경하는 모든 것들을 빼앗아갔다. 김구 선생은 암살당했고, 김의환, 조소앙, 안재홍, 조완구, 김규식, 엄항섭, 최동오 등은 납북됐으며, 아들은 한때 의용군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수당은 이렇게 절규했다. “왜 이다지 험하기만 할까? 왜 이다지 매정하고 야박할까. 나는 그때 비로소 조국에 하소연했다. 잘못이 내게 있다면 나를 처벌하라고. 내가 더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나를 부르라고. 내가 붙들고 있는 사람을 부르지 말라고. 벌주지 말라고.” 1·4후퇴 때 수당은 서울에 남는다. 연로한 시어머니와 어린 손녀와 함께 피난을 갈 수도 없었다. 혹시 성엄이 돌아올까… 미련도 있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그해 추석을 수당은 종로경찰서 유치장에서 보내야 했다. 부역죄가 뒤집어씌워져 있었다. “(유치장)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내 심정은 갈가리 찢겨나갔다. 왜놈 경찰의 손아귀에 들어갈 때와 부역죄로 동포 경찰관의 손에 끌려 들어갈 때를 견주어 보아 모든 게 너무나 달랐다.” “서러웠다. 슬펐다. 이유가 너무 분명한 쓸쓸함이었고, 서글픔이었다. … 아침저녁으로 퍼붓는 간수들의 욕지거리, … 머리 위로 치켜드는 간수의 손에 여지없이 들려 있던 채찍.” 수당은 무너졌다. 중국 대륙의 풍찬노숙 속에서도 꼿꼿했던 그의 몸에서 담도 기력도 빠져나갔다. “6·25는 …슬그머니 성엄을 빼앗아갔고, 맹랑하게도 나를 한 달 동안 감옥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나를 주저앉게 만들었다. 이제 겁없이 국경을 넘나들던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한 달간의 그 차가웠던 마룻바닥이 내 가슴마저도 식게 만든 것이었다.” 그 서러움을 칠언절구에 담았다. “아직껏 고생 남아 옥에 갇힌 몸 되니(餘苦未盡入獄中), 늙은 몸 쇠약하여 목숨 겨우 붙었구나(老軀衰弱句息存), 혁명 위해 살아온 반평생 길인데(半生所事爲革命), 오늘날 이 굴욕이 과연 그 보답인가(今日受辱果是報) …” 이후 그의 40년 삶은 아득한 기다림이었다. 그가 중국 대륙에서 풍찬노숙하며 꿈꾸던 그런 날에 대한 기다림. 허망한 명예나 이름을 바라서도 아니고, 알량한 재력이나 권력에 대한 미련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살아 있는 한 내가 지내온 날들과 연결된 또 하나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고 끝나는가를 똑똑히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가 맞는 하루 또 하루의 아침은 언제나 ‘춥고 쓸쓸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수당과 ‘여승’은 닮았다. 그 서러움의 결이. 그러나 어데 시인이 있어 수당의 그 맵디매운 슬픔을 서러워할 것인가. 그 서러움을 담기 위해선 역사는 얼마나 깊고 뜨거워야 하는가.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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