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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2.25 18:29 수정 : 2014.02.25 18:29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곽병찬 대기자
동남쪽 아득한 곳에 창녕의 진산 화왕산이요, 북쪽으로 가물거리는 건 비슬산이다. 해지는 쪽으로 우포늪이 있고, 우포늪 너머엔 낙동강이다. 그 사이 그리고 강 건너까지는 모두 아득한 들이다. 화왕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한 토평천은 석리로 들어서면서 남으로 활처럼 크게 휘어져 어묵리들을 빚어내고, 낙동강으로 흘러들면서 정지들을 펼쳤다. 토평천을 활대 삼아 팽팽하게 당긴 시위의 중심에 대지면 석리 창녕성씨 고가가 있다.

고가 뒤엔 구릉 하나 있다. 누우면 들이요 서면 산이라, 그 위에 장군죽 늘푸른 대나무가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으니 녹산이라 이름할 만하다. 아득한 화왕산 넘치는 기운이 길게 흐르다 멈춘 곳이니 풍수인들의 눈에는, 멀리 날던 용이 잠시 머리를 돌려 저의 본향을 쳐다보는 회룡고조의 형국이다. 또는 꿈틀대던 구릉이 멈칫 서서 고개를 치켜든 것이 지네의 머리를 닮았고, 계관을 인 화왕산의 부리가 그곳을 향하는 형국(오공대계)으로 비칠 법도 하다. 풍수에서 재력이 모이는 터인데, 실제 녹산 기슭엔 재물을 상징하는 청석이 켜켜이 쌓여 있다.

사주명리학자 조용헌은 강릉 선교장, 구례 운조루와 함께 이 터를 조선 3대 명당이라 꼽았는데, 입향 후 불과 100여년 만에 일군 그 가세를 보고 그리 꼽은 것인지, 아니면 실제 그 터에 그런 이재의 비기가 숨겨져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풍수의 설명에 귀가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녹산을 후원 삼은 성씨 고가는 예사롭지 않다. 130여칸 37칸에 이르는 한옥들이 이마를 맞대고 있다. 왕조가 정한 사대부 가택의 한계인 99칸을 훌쩍 넘어섰고, 궁궐이나 관청에나 쓰이는 두리기둥이 안채 사랑채 등을 떠받치고 있으니, 그 또한 왕조의 규율에서 벗어났다. 사주명리학자 조용헌은 강릉 선교장, 구례 운조루와 함께 이 터를 조선 3대 명당이라 꼽았는데, 입향 후 불과 100여년 만에 일군 그 가세를 보고 그리 꼽은 것인지, 아니면 실제 그 터에 그런 이재의 비기가 숨겨져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풍수의 설명에 귀가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다.

입향조 성규호 선생이 유원면 회룡에서 그곳(석문동)으로 옮긴 것은 1850년대. 그는 디귿자의 안채와 일자의 사랑채를 짓고, ‘나 또한 돌처럼 살리라’(아석헌) 뜻의 아호를 당호로 삼았다. 장남(찬영)에겐 오른쪽 담장에 잇대어 살림집(구연정)을 짓게 했고, 둘째는 왼쪽 담에 잇대어 살림집을 내도록 했다(석운재). 석운재 담 너머엔 찬영의 막내(낙안)가 1920년 초부터 경근당을 짓고 살기 시작했으니, 위로 옆으로 4대가 함께 사는 저택을 이뤘다. 고택이라 이름하지 않고 고가(경상남도 문화재자료 355호)라 한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장손 찬영에겐 낙문 낙교 낙안 3형제가 있었다. 둘째 낙교에게 손이 없자 낙문의 둘째(유경)로 하여금 대를 잇도록 했다. 그리하여 증손대에 이르면, 구연정은 윤경, 아석헌은 유경, 경근당은 낙안의 아들 재경이 이어받았다.

장손 낙문은 가산을 크게 일으켜 가택을 중심으로 반경 6㎞의 드넓은 전답을 경영했다. 소출만 쌀 8000석, 보리 8000석에 이르렀다. 낙문은 구연정 앞마당에 연못을 파고 별당을 짓고, 솟을대문과 솟을중문을 올리고, 병천정사 강당을 옮겨 고방을 삼았다. 연못 옆에는 동산을 쌓아 기화묘초를 심어 한옥의 전통 구조에서 일탈했다. 일찍이 신문물에 눈이 뜬 셋째 낙안은 안채에 외창을, 뒤쪽엔 화장실을 붙였고, 사랑채에 별채를 잇대는 등 파격을 가했다. 반면 아석헌과 석운재는 전통을 그대로 지켰다.

가문의 법도는 엄격했다. 적선을 가훈으로, 근검과 청렴을 가풍으로 삼았다. 할아버지 뜻을 따라 낙안은 ‘석문동의 백성’이란 뜻의 석민, 사촌 낙성은 석운, 석민의 아들 재경은 우석을 아호로 삼았다. 구연정 일곽 곳곳에는 물을 담은 돌확을 두어, 들고 나며 몸가짐을 청결히 하도록 했다.

석민과 석운은 사회사업에 열심이었다. 1920년 고가 앞 신작로 건너편에 3000여평의 부지를 내어 건물을 짓고 교사 3명을 두어 신식학교(지양강습소)를 운영했다. 석민은 고가 가까운 곳에 정면 5칸, 측면 2.5칸의 일신당(日新堂)을 짓고 정인보 선생 등 명망가들과 교유하며 보국안민의 걱정을 나눴다. 우석은 선친의 길을 따라 해방 후 경근당 앞에 지포중학교를 짓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성씨 일가는 양파 재배의 원조이기도 하다. 2대 찬영은 1909년 그곳에서 처음으로 양파 재배에 성공하고, 4대 재경은 채종에 성공해 대량 보급의 길을 닦았다. 재경은 인근 경작지에 보리 대신 환금성 높은 양파를 재배해 농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도록 도왔다.

해방 전후의 혼란 속에서도 성씨 고가가 손을 타지 않은 건 그런 사회적 책임의 실천 덕이었다. 눈에 띄는 호사로 입줄에 올랐을 법한 구연정만이, 한국전쟁 초기 그곳에 주둔했던 미군 부대가 서둘러 퇴각하면서 서류를 마구잡이로 태우다 소실되는 불운을 겪었다.

아석헌의 너른 품은 후대의 다양한 사상과 사회활동으로도 이어졌다. 4대에 이르러 좁게는 문중의 문제부터 넓게는 식민지 조국의 문제로까지 관심의 범위가 확장된다. 재경이 중간에서 사회사업에 천착했다면 장손 윤경은 오른쪽에서 가문의 일에 천착했고, 유경은 왼쪽에서 사회운동에 뛰어들었다.

보성중 3년생이던 맏이 일기는 이듬해 어머니가 있는 북으로 간다. 다시 이듬해 전쟁이 터지고, 인민군이 북으로 퇴각하던 9월 유경은 두 딸을 마저 데리고 북한으로 간다. 그 두 딸이 바로 북한 현대사의 풍운과 비극의 주인공 혜림과 그 언니 혜랑이다.

특히 유경은 일찍이 일본에서 국사관중학을 거쳐 일본 외국어전문학교를 다녔지만 뜻한 바 있어 학교를 중퇴하고 신간회 등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일제 말부터는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과 교유한다. 고향에 첫째 부인과 세 딸이 있었지만, 뜻을 같이하던 김원주를 맞아 아예 딴살림을 차리고 1남2녀를 두었다. 이들의 서울 돈암동, 명륜동 자택은 당대의 좌익 인사들이 회합하는 곳이었다. 반면 고향의 재경은 그곳에서 김성수 등 중도 우파들과 교유하며 농촌계몽운동에 나섰으니, 두 형제의 대조가 뚜렷했다.

김원주는 1948년 남북정치협상 당시 여맹 대표 자격으로 방북했다가, 아예 그곳에 눌러앉는다. 보성중 3년생이던 맏이 일기는 이듬해 어머니가 있는 북으로 간다. 다시 이듬해 전쟁이 터지고, 인민군이 북으로 퇴각하던 9월 유경은 두 딸을 마저 데리고 북한으로 간다. 그 두 딸이 바로 북한 현대사의 풍운과 비극의 주인공 혜림과 그 언니 혜랑이다.

일기는 강동정치학원을 수료하고, 열일곱 나이에 유격대원이 되어 남쪽으로 내려온다. 전쟁이 끝난 뒤 창녕 큰집에 숨어 지내던 중 체포되지만, 가문의 후광 덕에 구금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부모의 행적이 드러나면서 잠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생 혜림은 뛰어난 미모와 발군의 연기로 북한의 인민배우급으로 발돋움했다. 혜림은 영화광 김정일의 눈에 띄었다. 그는 이미 소설가 리기영의 아들 리평과 결혼해 딸(리옥돌)까지 두고 있었던 터였지만, 김정일의 강청에 따라 리평과 이혼하고 동거하게 된다. 하지만 다섯살 연상인 이혼녀 혜림과 황태자 김정일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아버지(김일성)의 책망이 두려워 쉬쉬하던 끝에 김경희(김정일 여동생)의 강권에 따라 언니 혜랑과 함께 러시아로 떠나야 했다. 맏아들 김정남도 있었지만, 권력은 비정했다.

모스크바에 동행했던 혜랑의 딸 이남옥은 1992년 망명했다. 이미 모스크바에서 유학중이던 혜랑의 아들 이일남(이한영)은 1982년 10월 한국으로 망명했다. 혜림은 1996년 잠시 스위스로 잠적했지만, 아들 김정남의 장래 때문에 결국 모스크바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그의 곁을 지키던 혜랑은 망명했다. 혜림 역시 2002년 5월 모스크바의 한 병원에서 쓸쓸하게 생애를 마쳤다. 주검은 모스크바 인근의 트로예쿠롭스코예 공동묘지, 스탈린 무덤 옆에 묻혔다. 조카 이한영은 1997년 2월 성남 분당의 한 아파트에서 살해당했다. 아들 김정남은 오랫동안 떠돌이 신세였고, 손자 한솔 역시 파리에 유학중이라지만 사실상 유랑 신세다. 조국을 위해 선택한 것이었지만, 북쪽에서 유경 일가의 삶은 그렇게 처절하게 찢겨졌다.

지금 성씨 고가는 낙안-재경-기학으로 이어지는 반쪽의 역사만 들려준다. 낙교-유경-일기로 이어지는 그 그늘은 숨겨지거나 지워지고 있다. 물론 감당하기 힘들 만큼 그 그늘이 깊었던 까닭도 있었을 것이다. 쇠락해가는 성씨 고가를 지키고,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이 유경-기학(영원무역 회장)인 까닭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반쪽이 지워진 역사는, 사랑채가 허물어진 것만큼이나 쓸쓸하다. 자신이 택한 조국으로부터 배반당하고 역사의 뒤안으로 쓸쓸히 사라졌지만, 유경의 역사 또한 소중하다. 그 자손을 오른쪽 왼쪽에 두어, 변화와 전통을 추구하도록 한 입향조 어른의 뜻이 궁금하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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