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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4.08 19:07 수정 : 2014.04.08 22:43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아~으, 꿈이었다. 바람에 떠다니고, 물길에 실려 갔다. 강마을은 구름이었고, 물길은 하늘로 올랐다.

이태백의 별유천지, 안평대군의 도원경, 도연명의 무릉계가 어디 따로 있었던가. 회룡마을 안산엔 개불알꽃 쪽빛 융단 위로 매화가 꽃구름으로 내려앉았다. 천담마을 신씨네, 정씨네, 김씨네 할 것 없이 대문 옆엔 매화요 뒤란엔 살구다. 외양간에도 변소에도 꽃향기 물씬하다. 구담마을은 여전히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환장하게 그리운 모습 그대로다.

어치리부터 순창 땅. 바빠진 물살은 내룡마을 장구목에 돌조각을 즐비하게 세워놓았다. 구미리로 접어들면서 빚어놓은 북소 사발소 두무소 등 온갖 탕이 희한하다. 구미교를 건너면 석산리, 강 건너 용혈을 안고 있다는 채계산과 대좌한 강경마을이다. 해도 지고 달도 졌어도 묻어온 향내가 도저하다. 어둔 강은 매향으로 흘렀다.

미명에 눈 비비니, 강도 들도 산도 없다. 온통 안개다. 오로지 물소리뿐. 재잘재잘, 수런수런, 자글자글~. 밤새도록 소곤댔을 놈들이 여지껏 두런댄다. 새벽참에 떠나기로 했지만 어쩌겠는가, 채계산 능선 아래 용혈의 기운이나마 드러날 때까지 물소리에 귀 기울이는 수밖에.

오라, 그제야 알았다. 그 산수 그 때깔에 도리가 없었겠지만, 나는 섬진강을 소비하기만 했다. 눈으로 그 풍광 허겁지겁 삼켰다. 내룡마을 장구목 바위 하얀 속살 사이로 물비늘 날리며 흐르던 물길, 회룡마을 징검다리 사이로 우당탕 흐르던 물길. 구담마을 물소리는 늦은 밤 부모님 두런대는 소리 같았고, 가는지 마는지 진메마을 물길은 늙은 느티나무처럼 속으로 모든 걸 삼켰다. 그 물길이 한사코 들려주려던 이야기를 듣지도 느끼지도 못했다. 섬진강이 왜 서럽게 흐른다고 하는지, 강을 흐르는 것이 물만이 아니라는 걸, 떠다니는 꽃, 부서지는 햇살만이 아니라는 걸 몰랐다. 여울물마다 나이테가 촘촘히 새겨져 있고, 돌아가는 여울은 엘피판처럼 끊임없이 서럽게 노래하고 있다는 걸 몰랐다.

강마을 안개는 나의 등을 떠밀었다. 다시 거슬러 오르라고, 눈으로 포식했던 그대, 이제는 귀로 듣고, 마음으로 걸어야 하리.

수원지 진안 데미샘까지 갈 필요는 없다. 섬진강은 임실 강진면 용수리에서 막힌다. 물길은 동남으로 흐르지만 유역변경식 댐은 갇힌 물을 서쪽 동진강 만경평야로 흘려보낸다. 넘치도록 차야 제 길에 내어줄 뿐이다. 섬진강 수원지는 댐과 함께 수정됐어야 했다.

그 가난한 물길은 회문리에 이르면 비로소 넘실대기 시작한다. 물우리에 이르면 다시금 도저하다. 그 비밀은 회문산에 있다. 열두 골짜기 골골에서 토해낸 물은 섬진강을 다시 살찌우고, 구림 쌍치 개울이 한데 모여 기세등등한 구림천이 물우리에서 합류할 때쯤 제 모양을 되찾는다. 오죽 물난리를 겪었으면, 물이 걱정스러워 물우리라 했을까.

1951년 겨울이 막 물러가고 섬진강변 매화들이 첫 꽃망울을 터트릴 무렵이었다. 빨치산은 회문산 8부 능선을 타고 남원 지리산 쪽으로 탈출하고 있었다. 하늘에선 무스탕기가 일주일째 폭탄을 쏟아붓고, 정상 부근 헬기장에선 드럼통째 기름을 내리붓고는 불을 질렀다. 북조선 노동당 전북도당 사령부와 정치 학교 노령학원이 있던 안정리 계곡은 불바다가 되었다. 절반 이상의 동료를 잃었다. 더는 버틸 수 없었다.

구림 복흥 쌍치 등 회문산 군에 에워싸인 마을도 주검이 발에 차일 정도였다. 낮에는 토벌군이, 밤에는 빨치산이 부역자를 색출했다. 결국 토벌군은 근거를 아예 없애기로 하고, 자연부락들을 모두 소개하고, 집과 가재도구와 먹을 만한 것들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의심스런 사람들은 모두 없앴다. 그때 회문산 일원은 지상의 지옥이었다.

앞서 연합군이 인천에 상륙하면서 인민군은 38선 이북으로 퇴각했다. 인공 시절 마을마다 구성돼 있던 전북의 민청이나 여맹원들은 도당과 함께 담양 여분산 가마골로 들어갔다. 백방산, 국사봉과 함께 하나의 회문산 산군을 이루는 곳이다. 봉우리들은 용추봉을 통해 투구봉, 회문산 정상으로 이어진다.

가마골에 모여든 이들은 열에 여덟은 머슴이거나 소작인 출신으로 20~30대가 대부분이었다. 당시로서는 인텔리였던 중학교 이상 학력 소지자도 열에 두셋은 됐다. 식민지 시절 일제에 무장투쟁 혹은 소작쟁의를 벌였던 나이 든 이들도 있었다. 해방이 되면 수탈과 착취가 없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믿던 이들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일제에 부역하며 수탈을 대행했던 자들, 형제를 총알받이로 징용하고 누이는 성 노예로 끌고 가던 자들을 중용했다. 적산 재산마저 지주들에게 헐값으로 넘겨졌다. 저항했다가는 소작지마저 뺏겼다.

그러나 그들이 새로운 세상으로 생각했던 인공은 불과 2개월여 만에 엎어졌다. 구림 쌍치 복흥 덕치 칠보 운암 팔덕 강진 태인 청웅면의 머슴, 소작, 이상주의자들은 회문산 일대로 모여들었고, 그곳에서 유격병단을 꾸렸다. 그러나 뜻만 컸던 오합지졸. 1950년 10월 구성된 국방군 토벌사령부의 공세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회문산으로 퇴각했다. 회문산은 저들의 몸과 꿈을 지켜주리라 믿었다. 옛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정감록>이 꼽는 승지 중엔 ‘순북(順北) 20리’가 있다. 인근 사람들은 그것을 순창 북쪽 20리, 회문산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난리가 나면 피난민이건 저항군이건 회문산으로 들어왔다. 임진왜란 때도 그랬고, 동학농민혁명 때도 그랬고, 항일의병운동 때도 그랬다. 일제 때도 그랬고, 해방공간에서도 그랬다. 동학혁명군의 지도자 전봉준은 쌍치면 피노길로 피신했었고, 의병장 최익현 임병찬 양윤석 선생은 회문산을 중심으로 정읍 임실 순창에서 저항의 진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모두 그곳에서 체포되거나 전사했다. 회문산의 빨치산도 마찬가지 운명. 많을 때는 700여명에 이르렀지만, 사방팔방을 에워싼 국군의 적수가 될 수 있을까.

회문산 눈물 젖은 능선과 피어린 골짜기의 사연들은 계류에 실려 섬진강으로 흘러갔다. 몸서리치던 가난과 굶주림, 그래도 살아남게 했던 꿈, 죽음과도 바꿀 수 없었던 이상, 그러나 결국 비참한 죽음. 꽃잎보다 가볍고 햇살보다 반짝이는 물길이 그렇게 무겁고 서러운 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투구봉의 전경은 한마디로 처참했다. 중부 능선을 시퍼렇게 덮으며 밀려오는 국군 부대에 수백명의 전투원들이 총탄과 수류탄으로 맞섰다. 곳곳에 흥건히 고인 빗물이 피와 흙으로 뒤범벅이 되었고, 부상자고 전투원이고 이미 사람의 몰골이 아니었다. 생지옥이었다.” 소설 <남부군>은 회문산 빨치산이 지리산으로 탈출하기 직전 투구봉 전투 장면을 이렇게 그렸다.

“돌아서면 무덤이고 발에 차이는 게 유골이었대요. 훗날 비목이라도 세워 그곳이 무덤임을 일러주었지만, 예전엔 돌무더기나 흙무더기였죠. 처음엔 밤마다 그곳에서 귀곡성과 오열이 들리는 듯했고, 등줄기가 서늘해지곤 했습니다. 마을 어른들은 비구니 스님이 어떻게 그런 곳에서 혼자 사느냐고 걱정하셨죠. 피아를 떠나 가신 분들을 위해 기도하다 보니 이젠 그런 소리는 안 들리죠.” 만일사 주지 스님이 주는 차는 이야기가 깊어갈수록 청록이 선홍으로 바뀌었다.

회문산을 떠난 빨치산은 지리산으로 향했다. 멀리 깃대봉이 보이고, 그 너머로 지리산 연봉이 아득하게 펼쳐진다. 산능선 탈출로 아래로는 섬진강이 흘렀다. 진메, 천담, 구담, 회룡, 내룡 등 강마을엔 매화가 하나둘 피고 있었을 것이다. 실없이 향기로워 허기만 더해주던 꽃, 그애의 웃음 같고, 그 여자의 살내음 같고, 어머니의 비릿한 젖냄새도 나던 꽃.

회문산 눈물 젖은 능선과 피어린 골짜기의 사연들은 계류에 실려 섬진강으로 흘러갔다. 몸서리치던 가난과 굶주림, 그래도 살아남게 했던 꿈, 죽음과도 바꿀 수 없었던 이상, 그러나 결국 비참한 죽음. 안정리 아이들은 굴러다니는 해골을 차며 놀았다고 했으니, 꽃잎보다 가볍고 햇살보다 반짝이는 물길이 그렇게 무겁고 서러운 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강마을 꽃들은 섬진강이 불러낸 영혼들일 것이다. 그들의 꿈, 이상, 열정 그리고 서러움이었을 것이다.

남원으로 곡성으로 구례로, 그리고 더 큰 상처를 안은 지리산 자락을 감싸 안고 흐른다. 거기서 더 많은 원혼들을 불러내고, 더 많은 꽃들을 피워낸다. 아름다움이 지극하면 서럽다고들 말하지만, 지극한 서러움은 아름다움 그 너머에 있는 법. 섬진강이 결국 내 안으로 흘러들어 두고두고 여울지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곽병찬 대기자
섬진강은 그저 두런두런 흘러간다. 남원으로 곡성으로 구례로, 그리고 더 큰 상처를 안은 지리산 자락을 감싸 안고 흐른다. 거기서 더 많은 원혼들을 불러내고, 더 많은 꽃들을 피워낸다. 매화 왕벚 개불알꽃 솔채 제비꽃 꽃다지…. 아름다움이 지극하면 서럽다고들 말하지만, 지극한 서러움은 아름다움 그 너머에 있는 법. 섬진강이 결국 내 안으로 흘러들어 두고두고 여울지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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