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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4.22 19:07 수정 : 2014.04.22 22:09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무죄한 이의 희생은 숭고한 가치들의 씨앗입니다. 그 씨앗은 인간성을 파괴하고 생명을 억압하는 차별과 억압, 폭력과 수탈의 죽은 땅을 뚫고 싹을 틔웁니다. 그곳에서 자유와 평등과 평화는 싹이 트고, 열매를 맺습니다. 무죄한 이들의 희생은 인간 존엄성에 대한 증거이며, 이 땅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장엄하는 꽃입니다.

해미는 벌써 부산합니다. 4개월이나 남았는데, 당신의 초상화와 축하 펼침막은 해미읍성, 자리개다리 등 수난의 길을 밝히고 있습니다. 당신이 되짚게 될 그 길들은 무죄한 이들이 짓밟히고 스러져간 곳입니다. 그곳은 세계사에 유례없는 폭력과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해미는 벌써 부산합니다. 4개월이나 남았는데, 당신의 초상화와 축하 펼침막은 해미읍성, 자리개다리, 진둠벙, 여숫골 등 수난의 길을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2000년 전 예수가 이 땅에 올 때 그랬듯이, 당신은 환영을 받으러 오는 것이 아님을 말입니다. 당신이 되짚게 될 그 길들은 무죄한 이들이 짓밟히고 스러져간 곳입니다. 그곳은 세계사에 유례없는 폭력과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은 인간 정신의 고결함을 확인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선포해야 합니다.

마침 해미읍성은 한가했습니다. 읍성 한가운데 회화나무는 하늘에 신록을 융단처럼 깔아놓았습니다. 150년 전 사람들이 산 채로 매달려 있던 동쪽 가지는 크게 잘려나갔지만, 그 자리에서도 작은 가지들이 신록을 피워올렸습니다. 슬며시 다가가, 거친 수피에 이마를 댑니다. 볼도 대고 입을 맞춰봅니다. 눈 감고 귀를 기울입니다. 오래전 나무가 보고 들었던 이야기들을 들어봅니다.

덕산 황무실에서 붙잡힌 방 마리아는 1868년 5월 해미읍성 호서좌영 감옥으로 이감됐습니다. 덕산 관아에서 매질로 살이 터지고, 주리를 틀려 정강이가 으스러진 몸으로 넘던 한티고개는 말씀으로만 듣던 골고다 언덕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길가엔 가야산 화사한 봄꽃들이 지천이었습니다. 배고플 때 먹던 찔레꽃도 한창이었습니다. 야속하지 않았습니다. 해미읍성은 내포의 치안을 총괄하는 병영. 주, 면천, 덕산, 아산, 예산 당진, 심지어 보령과 평택 등 내포의 전역에서 ‘천주 죄인’들이 끌려왔습니다. 읍성 안 내옥과 외옥도 차고 넘쳤습니다. 죽음의 문턱이었지만 오히려 평안했습니다. 아무러면 개돼지만도 못하게 취급당했던 지난날들만 못하겠습니까.

군정, 전정, 환곡 등 3정을 앞세운 지방수령은 피에 굶주린 사자였습니다. 군포를 더 거둬들이기 위해 뱃속에 있는 아이, 집에서 키우는 개, 심지어는 절굿공이까지 군안에 올렸습니다. 3년 전 돌아가신 시아버지에게까지 군포를 물렸고, 딸을 아들로 바꾸어 군포를 징수했습니다. 내지 못하면 소도 끌고 가고 개도 끌고 가고 가재도구까지 빼앗았습니다. 경작하지 않는 땅에도 세를 물렸고, 세금은 수령 멋대로였습니다. 양반 사대부, 돈 많은 사람들은 뒷돈 주고 빠져나갔으니, 가난한 이들은 그 몫까지 짊어져야 했습니다. 환곡엔 고리채가 붙었습니다. 6개월만 연체하면 두 배로 물어야 했습니다. 차라리 굶겠다고 해도 강제로 환곡을 할당했습니다. 더구나 모래가 반쯤 섞인 환곡이었습니다. 사자의 아가리에 목을 디밀고 있는 편보다, 여기서 목을 내주는 것이 나았습니다.

병인년부터 시작된 천주학 토벌은 1868년에 이르러 극성했습니다. 감옥에서 100보쯤 떨어진 곳에 오래된 회화나무 한 그루 서 있습니다. 문초 중에 얻어터지고, 주리 틀려도 배교하지 않은 사람들이 매달리는 나무였습니다. 서문 쪽 활터엔 장졸들이 시위에 활을 먹이고 회화나무에 걸린 이들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떠나는가, 죽음이여 화살보다 빨리 오라. 그러나 왜 그리도 질긴지, 화살은 비켜 갔습니다.

진남문으로 또 한 무리의 형제들이 끌려옵니다. 이젠 저들에게 옥사를 내주고 떠나야 합니다.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로 둘러쳐진 지성문(서문)을 나서야 합니다. 성안의 하수가 흘러나가고, 옥사한 주검이 실려 나가고, 처형당할 이들이 나가는 곳입니다.

서문 문간엔 십자가며, 묵주며, 천주책이 널려 있습니다. “밟아라, 앞으로는 믿지 않겠노라고 한마디만 하라. 그러면 이 문은 살아나가는 문이 될 것이고, 아니면 지옥의 문이 되리.” 문밖은 지옥도 그 자체였습니다. 교수형, 참수는 양반이었습니다. 돌구멍에 꿴 줄에 목을 맨 뒤 지렛대로 줄을 조여 숨을 끊거나, 돌바닥에 엎드려 놓고 긴 돌기둥을 내리눌러 압사시키거나, 한지로 덮은 얼굴에 물을 부어 질식시키는 등 형용할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도랑 위 자리개 돌에 사람을 패대기쳐 죽이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대기자는 늘었습니다. 형리는 다시 끌고 갔습니다. 핏물 흥건하고, 피비린내 진동하는 도랑을 따라 걸었습니다. 곧 해미천 건너 조산리 들입니다. 개울 가까이엔 깊은 둠벙이 있었습니다. 웬만한 가뭄에도 마르지 않았습니다. 형제들 등에 맷돌 따위가 하나씩 묶였습니다. 한명씩 둠벙으로 밀려 들어갔습니다. 둠벙이 차자 인근 숲정이로 갔습니다. 곳곳에 널찍한 흙구덩이가 파헤쳐져 있었습니다. 남은 이들이 들어갈 구덩이였습니다. 형제들은 그 속에서 무릎 꿇었습니다. 흙더미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홍주에서 오신 문 마리아님도 박 요한님도 모두 기도했습니다. 먼 훗날, 밭을 갈던 농부의 쟁기 끝에 걸려 드러난 인골들이 하늘을 향하고 있었던 건 무릎 꿇은 채 생매장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희생당한 사람은 병인박해에만 1000여명. 대부분 하층민이었습니다. 그들이 이 땅에서의 삶 대신 저 처참한 죽음을 선택한 까닭은, 역시 천주쟁이라 하여 강진에서 18년간 귀양살이했던 다산 정약용의 시 ‘애절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경 계해년(1803) 가을, “그때 갈밭에 사는 백성이 아이를 낳은 지 사흘 만에 군적에 편입되고 이정이 소를 토색질해 가니, 그가 칼을 뽑아 자신의 양경을 베면서 ‘내가 이것 때문에 이러한 곤액을 받는다’ 하였다. 그 아내가 양경을 가지고 관청에 나아가니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 울기도 하고 하소연하기도 했으나, 문지기가 막아 버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쓴 시였습니다.

“…정벌 나간 남편은 못 돌아오는 수는 있어도/ 예부터 남자가 생식기를 잘랐단 말 들어 보지 못했네/ 시아버지 상에 이미 상복 입었고 애는 아직 배냇물도 안 말랐는데/ 조자손 삼대가 다 군적에 실리다니/ 급하게 가서 호소해도 문지기는 호랑이요/ 향관은 으르렁대며 마구간 소 몰아가네/ 남편 칼을 갈아 방에 들자 자리에는 피가 가득/ 자식 낳아 군액 당했다고 한스러워 그랬다네/ …부호들은 일 년 내내 풍악이나 즐기면서/ 낟알 한 톨 비단 한 치 바치는 일 없는데/ 같은 백성인데 왜 그리도 차별일까?…”

다산은 개탄했습니다. “나라의 무법함이 어찌 여기까지 이를 수 있겠는가?” 그리고 경고했습니다. “이 법(군정 軍政)을 바꾸지 않으면 백성들은 모두 죽고야 말 것이다.” 경고대로 한편에선 순교와 죽음의 저항이 일어났고, 다른 한편에선 농민들의 거센 봉기가 잇따랐습니다. 남쪽에선 진주농민항쟁이, 북쪽에선 평안도에서 서북농민항쟁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1894년 동학농민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순교의 저항이 동학의 혁명운동으로 이어진 것이니, 이 모든 것이 인간 존중의 선언이었습니다. 뒤따른 증산도, 원불교도 인간 평등, 존엄한 인간의 정신을 이어받았습니다.

아직도 이 땅에선 무죄한 이의 희생이 되풀이됩니다. 권력의 폭력과 용산참사 등은 그 상징입니다. 저 회화나무 아래의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선언해야 합니다. 무죄하게 죽어간 이들의 이름으로, 맑고 순수한 청년들의 이름으로, 인간 존엄성을 향한 담대한 행진을 선포해야 합니다.

인간성에 대한 폭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읍성 뒤 오학리는 1세기 뒤 이념의 광기가 휩쓸고 지나간 땅이었습니다. 1950년 7월 퇴각하던 경찰은 보도연맹원들을 체포해 서산 성연면 메지골에서 처형했습니다. 9월 이번엔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양대동 바닷가에서 보복 처형을 자행합니다. 그리고 12월 경찰은 인공 기간 중 부역자들을 갈산동 산기슭에서 죽여 버립니다. 희생자만 500명 이상이었고, 오학리 사람이 많았습니다.
곽병찬 대기자

순교의 신심을 기억하기에 앞서, 무죄한 희생자의 죽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감당해야 했던 삶의 모순과 고통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무치게 염원했던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의 꿈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직도 이 땅에선 무죄한 이의 희생이 되풀이됩니다. 권력의 폭력과 용산참사, 쌍용차 노동자의 비극 등은 그 상징입니다. 돈이 인간을 노예로 삼고, 돈이 인간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합니다. 저 회화나무 아래의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선언해야 합니다. 무죄하게 죽어간 이들의 이름으로, 맑고 순수한 청년들의 이름으로, 인간 존엄성을 향한 담대한 행진을 선포해야 합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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