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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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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이정표가 서천식물예술원을 가리키면서 작은 별세계가 펼쳐진다. 키작은 관목들 속에 줄지은 솟대가 삼색버드나무(화이트 핑크 샐릭스)울타리의 연꽃정원으로 이끈다. 정원은 새 조형물들이 저마다 꿈을 꾸는 소도다. 야생화가 융단처럼 깔린 미로정원과 키 큰 나무의 숲이 이어진다. 초입은 여느 마을과 다르지 않다. 마을회관을 지나 이정표가 서천식물예술원을 가리키면서부터 작은 별세계가 펼쳐진다. 키 작은 관목들 속에 줄지은 솟대가 삼색버드나무(화이트 핑크 샐릭스) 울타리의 연꽃정원으로 이끈다. 정원은 새 조형물들이 저마다 꿈을 꾸는 소도다. 야생화가 융단처럼 깔린 미로정원과 키 큰 나무의 숲이 이어진다. 개화기 연못은 150여종이나 되는 연꽃들이 우아함을 뽐낸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던 터라 마음이 바빴다. 따듯한 흙돌담도 지나치고 느티나무 그늘도 비켜가고, 옹기 조각으로 바닥을 장식한 아름다운 진입로도 살피지 못했다. 6월의 연못은 그러나 황금빛 혹은 핑크빛 수련 몇몇만 꽃을 피웠을 뿐이다. 애초 150여가지 연을 종류별로 차근차근 심으려던 것이었지만,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일꾼들이 뒤섞어 심었다고 한다. 하지만 다투어 꽃이 필 때면 재잘거림으로 터질 것 같은 초등학교 교실을 보는 것 같아, 40여년 세월을 교단에서 보낸 선생에게는 정감이 더 간다고 했다. 눈이 밝았다면 고샅에서 이미 예감했어야 했다. 당초 이곳은 새들을 위한, 새들의 공화국이었다. 각기 다른 색깔과 표정의 솟대와 새들이 300여개나 세워졌다. 비에 썩고 햇살에 퇴락하고 바람에 쓰러져 새 공화국은 포기했다. 대신 돌과 쇠로 만든 새 조형물로 아쉬움을 달랬다. 솟대가 성성했을 때 한 조각가는 주인장의 작지만 아름다운 꿈에 감동해, 육십 평생 가장 마음에 드는 솟대 조각물을 기증했고, 그것은 지금 연꽃정원의 랜드마크로 서 있다. 가장 오래된 스페인의 미로 암각화를 본떠 돌로 조성했다는 미로는 생명의 보금자리 자궁을 상징한다. 미로정원 입구 박석 사이사이에 깔린 핑크색의 낮달맞이꽃들과 무늬병풀 등이 예사롭지 않다. 주변엔 200여종의 희귀한 풀과 나무들이 자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대왕오엽송, 일본인들이 신성시하는 금송, 수형과 색깔이 특별히 아름다운 황금메타세쿼이아 등 희귀종이 뒤를 받쳐준다. 멸종 위기의 구상나무 숲을 조성할까도 했지만, 잘 자라던 묘목을 삯꾼들이 잡초인 줄 알고 30여만그루나 뽑아버려 포기했다. 기산면 화산마을에서 아들까지 4대째 살고 있는 김재완 선생에겐 몇가지 꿈이 있었다. 무관심과 무지로 말미암아 아름답고 귀한 우리 토종들이 외국으로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게 하나였다. 그건 수생식물의 천국 연꽃정원과 귀한 들풀·관목·교목들이 늘어선 미로정원에 담겼다. 우리 토종이었지만 외국으로 넘어가 이제는 우리가 로열티를 내고 들여와야 하는 미스킴 라일락, 오색동백, 히어리가 지금도 안타깝다. 다른 꿈 하나는 역시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사라져가는 것들을 지키는 일이었다. 스무살 되던 해였다. 중국의 옛 동전은 반출이 안 되지만, 우리 옛 동전은 마음대로 반출되고 있다는 기사를 보고는 한편으론 한국은행에 항의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론 당신이라도 동전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의무감에서 시작했지만, 세련된 도안이나 세공 솜씨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 일은 한국은행 등 할 수 있고 해야 할 기관들이 많았다. 달리 우리의 정서와 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게 없을까? 그때 눈에 띈 것이 옹기였다. 선사시대부터 우리 곁을 지켜온 옹기, 구들장 문화에서 생활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필수품이었다. 그러나 옹기는 상것이었다. 양반 사대부나 궁중에서 사용하던 청자나 백자가 받는 대접과는 비교할 수도 없었다. 교과서에서조차 옹기나 질그릇이라는 우리 이름은 외면하고, 일본에서 쓰이던 토기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누가 알아주든 말든 옹기는 우리 삶을 구석구석 받쳐주는 효자였다. 청자와 백자는 쓰임에 한정이 있지만, 옹기는 장독이나 김칫독부터 심지어 악기나 어구, 운동용품, 소줏고리, 연통, 욕조, 장군, 퇴비 발효 용기, 장식용 공예 등 한정이 없었다. 어구만 해도 주꾸미, 문어, 미꾸라지 잡는 옹기가 모두 달랐다. 굴뚝 몸체는 물론 굴뚝을 멋스럽게 마감하는 연가, 때론 사체를 수습하는 관에 이르기까지 옹기는 우리와 생로병사를 함께했다. 빚는 법도 다양해 제주도 옹기는 유약을 안 썼고, 강원도 푸레독은 생솔가지 연기로 코팅을 해, 정수 정화 효과가 컸다. 그렇게 쓰이다 보니 기술력은 세계 최고였다. 중국 것은 두께가 5~6㎝에 이르지만, 우리 것은 평균 5㎜ 안팎이다. 두껍다 보니 중국이나 서양 토기는 돌덩어리처럼 무겁지만, 우리 옹기는 여인네도 쉬이 들 수 있었다. 실용성만이 아니었다. 옹기에 담긴 문양이나 그림은 고도의 미의식과 꿈을 표현하고 있었다. 현대 추상미술을 능가하는 문양이 있거나 다양한 유약 처리는 현대 도예작품 이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백자·청자 화병만큼이나 세련된 사군자와 포도·잉어·모란·나비·학·갈매기·토끼·거북이·원숭이 그림도 있고, 강서대묘 고분벽화의 삼족오가 그려진 항아리도 있다. 얼룩무늬 독은 일본의 한 수집상이 무릎 꿇고 김 선생에게 팔기를 간청했던 것이다. 서천 독뫼골에서 수집한 옹기에 새겨진 비상하는 세 마리 비둘기는 조선말 박해를 피해 살던 천주교 신자들의 자유와 평화를 향한 꿈을 그린 것이었다. 퇴직금으로 공사비를 충당하고 물려받은 전답 2만여평을 부지로 삼았다. 주례 사례비까지 쏟아부었다. 그렇게 조성된 식물예술원은 온전한 마을 재산이 되었다. 서천군이건 마을이건 손님이 오면 으레 이곳으로 데려왔다. 김재완 선생의 꿈과 정성은 향기로웠고, 결실은 아름다웠다. 그렇게 모은 옹기는 이제 너른 정원 두 곳을 채우고도 남아 비닐하우스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다. 선생은 당초 옹기들을 모두 지자체에 기증할 생각이었다. 단 고향인 화산마을에 박물관을 짓는다는 조건이 있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 지자체들이 옹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해 청주·부천·제주시 등이 박물관을 지었지만, 서천군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인근 군산에서 제의가 오기도 했지만, 고향에서 떠나보낼 수 없어 거절했다. 제 곁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건 평소 그의 세번째 꿈과 관련된 것이었다. 화산마을은 오래도록 가난했다. 그가 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이 마을에서 중학교 이상 진학한 사람은 김 교장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그런 화산마을에 사람들이 찾아오고, 그래서 살림도 피기를 오래도록 꿈꿨다. 결국 제 손으로 일궈야 했다. 2003년 2월 기산초등학교 교장직을 마지막으로 교단에서 떠나면서 지금의 정원과 전시공간을 짓기 시작했다. 퇴직금으로 공사비를 충당하고 물려받은 전답 2만여평을 부지로 삼았다. 그러나 밑천 2억원은 불과 2개월 만에 바닥을 드러냈다. 둠벙을 메우고, 새로 연못을 조성하고, 미로정원과 체험학습관 터를 고르고, 옹기정원 2곳의 담장을 두르는 것으로 끝났다. 나머지 마감 비용은 직접 조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례하고 받은 사례비까지 쏟아부었다. 그렇게 조성된 식물예술원은 온전한 마을 재산이 되었다. 입장료가 없으니, 서천군이건 마을이건 손님이 오면 으레 이곳으로 데려왔다. 마을에선 농촌체험 프로그램 속에 식물예술원 탐방을 포함시켰다. 덕분에 화산마을은 서천군 전통테마마을로 지정됐고, 관광공사가 꼽은 농어촌 체험마을 50선에 포함됐으며, 가장 가보고 싶은 농촌마을로 꼽히기도 했다. 선생은 그저 문화해설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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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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