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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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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깊기도 하지, 어떻게 찾아왔을까? 온통 산뿐인 강원도 평창, 동강으로 흐르는 대한민국 최고의 오대천 협곡, 저편엔 두타산 이편엔 백석산과 가리왕산, 그 골짜기 어디쯤의 하오개, 그곳을 왜 찾아왔을까. 2006년 대홍수 이후 마랑치교에서 올라오는 하오개길이 생겼지만, 이전엔 오대천 수항리 수항관광지에서 마랑골로 들어와 당목이재를 넘고, 고개 하나를 더 넘어야 했다. 오를 땐 뒤로 구를 듯한 고갯길 십여리를 넘고 또 넘어야 했으니, 예까지 온 까닭이 궁금하다. 하오개길 역시 좁은 계곡의 숲과 계류에 숨어 있어, 설마 저 길이 그 길일까 싶다. 권용택 화백이 이곳과 인연을 맺은 건 16년 전 어느 날. 당목이재 넘어 하오개까지 왔다가 내친김에 작은 고개 하나 더 넘어, 두 가구만 사는 이곳에 터를 잡았다. 프랑스 르살롱전에서 금상을 받은 권용택 화백. 1997년 사전심의를 받지 않은 제주 4·3항쟁 다큐 등을 상영해 수배자 신세가 됐다. 주변에선 잠시 피해 있으라고 했다.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하오개마을에 이르렀다. 그렇게 왔지만, 사람과 일을 보고는 지나치지 못하는 성미가 탈이었다. “저게 촛대승마입니다. 우리 마을 꽃이죠. 이건 신성일이 나온 영화 있죠, ‘야관문’이라고, 이름이 같아요. 원이름은 비수리고요. 저건 한약상들이 정신없이 좋아하는 호장근이고요. 이건 연 다음으로 잎사귀가 큰 병풍나물, 아, 그건 일본 사람들이 하나부사라고 부르고 학명도 그렇게 돼 있는 금강초롱입니다. 우리 토종인데, 일본이 가져갔죠. 혜문 스님이랑 학명 되찾기 운동이라도 하자고 했는데, 관에선 귀를 안 기울였어요. 이건 진부애기나리인데, 다행히 그 이름으로 불립니다. 저 멀대처럼 긴 풀이 산꿩의다리인데, 꿩의다리 종류만 5종이 있죠. 금꿩의다리, 긴꿩의다리, 좀꿩의다리….” 혼란스럽다. 저 양반, 스물여섯(1979년)에 프랑스 르살롱전에서 금상을 수상한 권용택 화백 맞아? 초입에 펼쳐진 루드베키아 꽃밭에서, 부부의 특별한 취향과 안목과 살림을 예감했어야 했다. 눈치를 챘나 보다. “나는 초보죠. 이 야생화들은 제 처(이향재 화백)가 관리합니다. 처는 음지에서 자라는 것들, 양지에서 자라는 것들, 적당한 그늘이 필요한 것들, 습지에서 자라는 것들을 나눠 각자에게 필요한 자리를 만들어주었죠.” 볕바른 곳에 층층나무, 벌나무 등이 자란다. 그 밑에서 반양지 풀들이 자라도록 식재한 것이다. 두메양귀비, 청강초롱, 좀동자, 할미꽃, 바늘꽃, 뻐꾹나리, 냉초, 물매화, 협죽도, 장구채, 잔대, 곤드레, 참좁쌀풀, 마타리, 둥근이질풀, 하늘말나리, 개불알꽃, 우산나물, 삼지구엽초, 민박쥐나물, 구슬공이, 백리향…. “저걸 곰취로 알고 먹었다가는 경을 칩니다. 저건 독성이 강한 동의나물입니다.” 부부가 관리하는 야생초 밭은 1천여평, 그곳에서 자라는 야생화는 400여종. 그저 뒤따르다가는 언제 설명이 끝날지 모를 일이다. 그는 그날도 마을 지도자 교육에 갔다 왔다. ‘진부면 리더’ 24명을 상대로 한 지역 역량강화 교육이었다. 2000년 초 떠밀리다시피 진부면 화의리 이장이 된 뒤 그에게는 이런 일복이 터졌다. 나이 오십 줄에 말이 필요 없는 곳에서 창작에 전념하겠다고 산 넘고 물 건너고, 또 고개 넘고 또 넘어온 하오개였는데…. 대학 졸업 뒤 경기도 수원에 터 잡고, 서정적 자연주의에서 출발해 극사실주의를 거쳐 초현실주의까지 자신의 표현 양식을 찾기에 몰두했다. 그런 그에게 1987년은 삶과 창작에 일대 전기였다. 뿌리 없는 미술을 떠나 모순 타개의 의지를 담는 민중미술로 돌아섰다. 민예총이나 민족미술인협의회는 물론 시민광장, 한마당 등 시민환경단체의 지역 대표로 사회운동의 앞줄에 섰다. 시위 대열의 맨 앞에는 노상 플래카드를 든 그가 있었다. 1997년 수원인권영화제 집행위원장이었던 그는 사전심의를 받지 않은 제주 4·3항쟁 다큐멘터리 등을 상영했다. 수배자 신세가 됐고, 주변에선 잠시 피해 있으라고 했다. 이곳저곳을 다니다가 하오개마을에 이르렀다. 그저 깊은 것이 마음에 들었다. 올해 초 간곡히 고사해 이장직을 놓았지만, 평창군의 빼놓을 수 없는 일꾼이 되었다. 바람조차 외로울 법한 그곳에 사는 이유는? 이장은 멋쩍게 웃었고, 부인이 대신 답했다. “언젠가 야생초 밭에서 김매다 보면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거예요. 아, 이렇게 좋을 수가!” 그렇게 왔지만 사람과 일을 보고는 지나치지 못하는 성미가 탈이었다. 큰 하오개, 작은 하오개, 마랑골 등 화의리 20여가구 40여명 남짓 주민은 이 외진 곳에 찾아온 이가 궁금했다. 그림 그린다는 사람이 어찌 이런 곳까지 왔담? 당목이재 넘어, 작은 하오개 넘어 슬금슬금 찾아와 헛기침을 하고, 문을 열어보고는 했다. 그렇게 통하기 시작했는데, 겨울이면 무쏘 승용차에 제설기를 달고 당목이재, 작은 하오개 등 마을길 제설작업을 하고, 봄이면 무너진 축대 다시 쌓고, 여름 지나면 범람한 계곡 망가진 도로를 정비하는 데 앞장서기에 이르렀다. 하오개길 꽃단장은 그가 주도했다. 늦게 합류했으니 그만큼 더 열심히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10년쯤 살다 보니, 노인회장 등 어른들이 이장직을 강권했다. 그로부터 4년, 그의 오지랖은 진부면 그리고 평창군으로까지 넓어졌다. 올해 초 간곡히 고사해 이장직을 놓았지만 평창군의 빼놓을 수 없는 일꾼이 되었다. 전국적으로 알려진 평창송어축제가 출범하던 2010년, 그는 축제의 조형물이나 상징물 도안을 맡았다. 올해는 홍보국장으로 활약(?)했다. 이 지역 화가들을 설득해 평창미술인협회를 결성했다. 평창 다문화 가족이나 지역 어른들을 상대로 한 미술아카데미를 연다. 일부 전업화가들로 ‘평창 사람들’을 꾸려, 평창의 자연과 사람 그리고 역사와 설화 등을 화폭에 담아내는 ‘평창이야기전’을 1년에 두차례씩 열고 있다. 이미 3년, 앞으로 3년을 더 하면, 겨울올림픽이 열릴 때쯤 평창의 최고 전시회가 될 것으로 자신한다. 최근엔 문화적 기반 확충을 위해 평창문화재단을 설립했다. 하다못해 군에서 발행하는 월간 소식지의 군민기자단 회장까지 맡았다. 물론 모든 활동의 출발점은 화의리다. 이장은 그만뒀지만 봄철 백석산 등산과 산나물 채취, 5월 어버이날 여행, 6월의 마을 천렵 등 부부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행사가 있으면 사진도 찍고 사연도 기록해 온라인에 올린다. 그러다 보니 권 이장 블로그는 언제나 화의리 소식 천지다. 하오개엔 청석이 지천이다. 수천만년 전 이곳은 수천m 바닷속이었다고 한다. 급격한 지각운동으로 백두대간이 형성되었고, 바닷속 엄청난 압력에 눌렸던 돌이 지표면에 드러나면서 널판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균열이 생겼다. 균열 따라 떨어져 나온 청석은 지금도 깊은 바닷물 속을 기억하는지 짙푸르다. 그 빛깔과 주름에 마음이 끌린 그는 하나둘 모아 곁에 두었다. 바람 말고 찾는 이 없는 그곳에서 청석은 그의 곁을 지키는 벗이 되었다. 본시 말이 없는 그와 청석의 만남은 운명과도 같았다. 그렇게 두고 있자니 청석은 언젠가부터 슬그머니 그에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바위틈에 피어난 하늘빛 동강할미꽃 이야기며 눈을 헤치고 노란 꽃을 피워내는 복수초 이야기며, 그 모진 눈 속에서 뿌리를 드러내고도 살아남는 인동초 이야기도 들려줬다. 깊고 깊은 바닷속 기억까지도 들려줬다. 가만히 듣노라면 청석은 산이 되고 물이 되고 꽃이 되어 있었다. 오대천 건너 두타산이 되거나, 설악산 울산바위 혹은 한계령이 되었고, 하오개를 안고 있는 백석산이 되어 있었다. 주름을 따라 맑은 계류가 흘렀고, 여울이 되어 부서졌고, 그곳에서 숭어가 고개를 내밀기도 했다. 그는 아크릴 물감으로 그런 돌의 이야기와 모습을 세상에 드러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그만의 돌그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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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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