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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8.12 18:42 수정 : 2014.08.12 18:42

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곽병찬의 향원익청(香遠益淸)

지금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저 늙은이를 지칭하는 건조한 일반명사가 되었다. 거기에 녹아 있던 관용, 배려, 사랑, 헌신, 너그러움, 따사로움 등의 가치는 대부분 사라졌다. 오히려 자식 잃은 부모 앞에서 행패를 부리는 어버이연합이나 엄마부대봉사단 따위가 먼저 떠오른다. 이제 이 땅, 특히 도시의 노년은 희생과 헌신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대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노년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행복할 수 있을까? 노년에도 자존감을 지킬 수 있으며 관용과 배려와 따듯함으로 존경을 받을 수 있을까?’ 완주로컬푸드를 찾아갈 때 심사는 그랬다.

‘노년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행복할 수 있을까? 노년에도 자존감을 지킬 수 있으며 관용과 배려와 따듯함으로 존경을 받을 수 있을까?’ 완주로컬푸드를 찾아갈 때 심사는 그랬다. 버스에 오르면 학생들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는 축에 속하다 보니, 아름답고 기품 있는 노년에 대한 간절함이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농촌이라고 다를까마는 완주에선 다르다니 기대가 컸다.

봉동댁, 아니 봉동댁의 며느리. 완주로컬푸드 모악산 매장에서 미숫가루와 두부과자에 가격표를 붙이던 젊은 아낙은 선뜻 두부과자 한 봉지를 건넸다. 손사래 쳤지만 “우리 어머니가 만든, 첨가물 하나 없이 두부로만 만든 과자이니 한번 맛보시라”며 안겼다. 가격표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두부스낵, 가격 4300원, 생산자 봉동댁, 전화 010****, 주소 완주군 봉동읍 낙평리.” 그건 두부과자 만드신 분의 얼굴이었다. 너그럽고 자상하고 나누기 좋아하시는 할머니….

어느 날 박춘옥 할머니 핸드폰에 낯선 문자가 왔다. “어머님… 잘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풋고추 등 채소류 사진이 첨부돼 있었다. 아침에 출하한 채소를 구매한 소비자의 감사 문자였다. “정말 기분 좋았지라. 물건을 팔면서도 좋은 일을 할 수 있구나, 저절로 으쓱했제. 더 싱싱하고 건강한 것들을 내놓아야지.” 감사와 존중을 받는다는 느낌에 할머니는 더욱 행복하다.

김복순 할머니는 마을의 65살 이상 노인들이 운영하는 두레농장에서 딸기, 자색양파 등을 기른다. 3인 1개조씩 번갈아가며 하루에 4~5시간 미만 일한다. 매장에 출하해 팔아 남긴 돈은, 우선 마을 복지기금으로 쓰고 남은 돈은 두레원들에게 돌아간다. 함께 일하고, 함께 놀고, 함께 밥 먹으며, 함께 농장 운영을 이야기한다. “우리 딸기가 최고제. 지하 150m 암반수로 키웠으니 맛이 없을 수 없어. 딸기는 수확 후 6시간만 지나면 당도가 떨어지는데, 공판장으로 출하하다 보면 소비자한테는 2~3일이 걸려야 들어가. 우리는 당일 수확해 오전 10시와 오후 2시에 매장에 직접 갖다놓으니 한나절만 걸려.” 치아가 성긴 할머니의 함박웃음엔 자긍심도 물씬하다.

“할머니, 마당에 엄나무 있네. 이거 한 뼘씩 잘라 잘 말린 뒤 출하하세요. 모과는 그냥 놔두면 썩거나 떨어지니까 미리 썰어서 설탕에 재워 출하하시구요.” 강성욱 생산관리팀장의 말에 양양순(86) 할머니는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양 할머니는 매장 최고령 생산자다. 할머니에겐 따로 밭이 없다. 산비탈 묏등이나 산자락 빈 땅을 일궈 취, 땅콩, 참깨, 들깨, 옥수수, 감자, 당근 따위를 매장에 내놓는다. 다리가 불편해 전동 휠체어로 이동하며 농사를 짓는다. 이제 동네에는 놀리는 땅이 거의 없다. 평소엔 심지도 않을 호박, 토란, 땅콩, 취나물 등속까지 심어져 있다. 매장으로 가면 모두 용돈이 되어 돌아온다.

소농들에겐 판로가 없다. 자가소비나 자식이나 친척에게 나눠주는 게 고작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농사를 포기하게 되고, 자식에게 의존해 살아간다. 노는 땅은 늘고, 어르신들 건강은 나빠진다. 농촌이라지만 농사꾼은 줄어들고 공동체도 고사한다. 귀농자가 는다지만, 농사로는 돈이 안 되다 보니 가진 재산 축내다가 대개 몇년 안 돼 농촌을 떠난다. 그래서 완주군이 추진한 게 전주의 소비자와 완주의 고령농·소농 생산자를 잇는 직거래 매장. 벌써 용진, 효자동, 모악산, 하가 매장 4곳으로 늘었다.

문제는 다양한 품목(300종 이상)을 사철 공급하는 것과 좋은 품질. 4년쯤 고령·소농 생산자를 조직해 조합원만 1500여명이 되다 보니 품목의 다양성에는 문제가 없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각종 추억 속의 먹거리, 식자재, 약재들까지 쏟아낸다. 삐삐목, 참빗살나무, 생강나무, 접골목, 담쟁이덩굴, 자귀, 으름덩굴, 야관문, 노박덩굴 말린 것들도 있다. 마을마다 조직된 두레농장에선 특화된 품목을 출하한다. 평치두레는 부추와 수박, 오복두레는 블랙베리, 약암두레는 표고버섯 등 버섯류, 인덕두레는 참나물, 로메인, 브로콜리 등….

화산면 홍정란(54) 어머니는 지난봄 이런 편지를 보내왔다. “이른 봄 나무농장에 살충제를 뿌렸는데 사무실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나무 밑에서 캐서 출하한 쑥에서 농약성분이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기뻤습니다. 이렇게도 세밀하게 검사하는구나, 믿음이 오히려 더 깊어지게 되겠구나.” 단기 출하금지 규제를 받고 있지만 로컬푸드에 애정은 더 커졌다. 매장에선 출하 전 제초제나 살균제 등 54가지 잔류농약검사를 하고, 군에서는 2주에 한번 264종의 잔류농약검사를 한다. 진열 기한도 엄격하다. 엽채류, 유정란 1일, 과채류 1~2일, 근채류 1~3일, 건물류 7일, 버섯류 1~2일, 가공품류 30일, 두부와 콩물은 1일이다.

“인자는 애들한테 용돈도 준다니께. 내가 가꾼 농산물 가까분 도시 사람들이 먹어준께 고맙고, 아무래도 정성이 더 가지 않겄소.” 어디 행복한 노년, 품위 있는 노년 없느냐고? 자존감과 기품은? 완주로컬푸드 매장, 어르신들이 농산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는 아침 6~7시에 들러보라.

바쁜 일상은 마을에서 술과 고스톱을 밀어냈다. 새벽 4시쯤 일어나서 그날 수확할 것 수확하고, 포장한 뒤 7시 전후해 매장에 도착해 가격표 붙여 진열한다. 돌아와서 식사한 뒤 한숨 자고, 두레농장 일을 하고 쉰 뒤, 저녁에 다음날 출하할 농산물을 정리한다. 채취할 것 채취하고, 갈무리할 것 갈무리한다. 그러니 건강도 좋아져 건강보험공단이 표창장을 줘야 할 판이다.

“지금꺼정은 새깽이들이 주는 돈으로 살아왔제. 인자는 농장에서 돈푼이나 번께 여한이 없어. 애들한테 용돈도 준다니께. 내가 가꾼 농산물 가까분 도시 사람들이 먹어준께 고맙고, 아무래도 정성이 더 가지 않겄소.”(구암마을 김복순 할머니) 자식들에게 기대기는커녕 오히려 도움을 주니 떳떳하다. 몸이 건강하니 하루하루가 즐겁고 소비자들로부터 감사 편지까지 받고 보니 자부심도 크다.

구이면 상학마을의 김양순 어머니는 이런 내용의 편지를 군수에게 보냈다. “…처음에는 매장에 내는 먹거리가 있을까 생각했는데 하다 보니 돈 될 거리가 생기더라고요. 천원의 행복이 이렇게 큰 기쁨을 선사할 줄이야. 정말 재미있습니다. 항시 건강하시고….” 할머니는 편지와 함께 불우이웃돕기 성금 100만원을 보냈다. 원두현마을에서 구기자, 마, 울금, 옻나무, 익모초, 약쑥, 야콘 등을 출하하는 이창영 할아버지는 해피스테이션이 아예 생활공간이다. 직원들 밥도 함께 먹고 허드렛일도 도와주신다.

평화동의 강성길씨는 이런 편지를 조합에 보내왔다. “떡을 좋아하는 아내를 따라 해피스테이션에 가보니 열광하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떡메마을 떡은 쫄깃한 식감과 달지 않은 맛, 시중의 떡집이나 제과점 떡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생산자분들의 사진을 보면 농산물에 대한 신뢰까지 더해져, 안 그래도 저렴한 가격이 너무 싼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 요즘 짝퉁 로컬푸드 전단이 돌아다니는데 농민들에게 애꿎은 피해가 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곽병찬 대기자

효자동 매장엔 아주머니들이 서명을 받고 있었다. 효자동 매장 건물주인 전주시에 매장 철수 요구를 철회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이었다. 한 효자동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매장은 우리에게 냉장고나 다름없어요. 그날 출하되는 농산물이 여기에 다 있는데, 냉장고에 쌓아둘 필요가 없잖아요. 여긴 건강밥상 보증수표입니다.” 서명운동은 시민들이 농민들에게 전하는 감사의 표시였다.

완주로컬푸드협동조합은 완주의 5000여 농가 가운데 소농과 고령농을 중심으로 ‘3000농가에 월수입 150만원’을 목표로 했지만, 이미 목표를 200만원으로 높여 잡았다. 어디 행복한 노년, 품위 있는 노년 없느냐고? 노인이 자존감과 기품을 지키며 사는 곳이 없느냐고? 완주로컬푸드 매장, 어르신들이 농산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오는 아침 6~7시에 들러보라. 왁자한 웃음과 자긍심이 반짝이는 어르신들을 만날 수 있다.

곽병찬 대기자 chankb@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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