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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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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의 향원익청
고즈넉한 열두 굽이 산속에서건, 온갖 마을 이야기 다 모이는 우물가에서건, 느릅나무는 우리 곁을 지켜왔다. 수분이 많고 부드러운 속껍질은 전분이 많아 가난한 이들의 구황식품이었다. 각종 약재로도 쓰였다. 새순을 갈아 먹으면 숙면을 할 수 있다고 했다.
느릅나무의 덕성을 세상에 다시 알린 것은 이환용 평강한의원 원장의 덕이 컸다. 느릅나무의 약성을 바탕으로 개발한 비염 치료제는 그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가난을 벗어나자 시작한 일이 고향 뒷산을 생태적으로 재현하는 것이었다. 1997년부터 포천에 식물원을 조성했다.
“머언 산(山)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두 굽이를
청(靑)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박목월 시인의 ‘청노루’가 탄생했던 일제 말, 어딜 가나 ‘불안하고 바라진’ 땅뿐이었다. 시인은 어딘가 은신할 수 있는 어수룩한 천지가 그리웠다. 그러나 어디에서 찾을까, 시인은 마음속에 이런 지도를 그렸다.
“가장 높은 산이 태모산(太母山), 태웅산(太熊山). 그 줄기를 받아 구강산(九江山), 자하산(紫霞山)이 있고 자하산 골짜기를 흘러내려 와 잔잔한 호수를 이룬 것이 낙산호(洛山湖), 영랑호(永郞湖). … 아득히 보이는 자하산 보랏빛 아지랑이 속에 아른거리는 낡은 기와집 청운사(靑雲寺).”(‘보랏빛 소묘’) 시인은 그곳에서 청노루의 ‘핏발 한 가닥 서리지 않는 눈’으로 임을 그리워하고 자연을 사모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왜 느릅나무일까?
고 김규동 시인도 나이 여든을 넘겨, 북녘에 두고 온 고향집을 그리며 ‘느릅나무에게’ 편지를 보낸다. 우물가 늘어진 머리채 흔들며 희멀건 하늘 떠받들고 있던 느릅나무는 ‘우리 집 가족사와 고향 소식을 그만큼 잘 알고 있는 존재가 없는’ 나무였다.
“~어린 시절 동무들은 어찌되었나/ 산목숨보다 죽은 목숨 더 많을/ 세찬 세월 이야기/ 하나도 빼지 말고 들려다오/ 죽기 전에 못 가면/ 죽어서 날아가마/ 나무야 옛날처럼/ 조용조용 지나간 날들의/ 가슴 울렁이는 이야기를/ 들려다오/ 나무, 나의 느릅나무”
고즈넉한 열두 굽이 산속에서건, 온갖 마을 이야기 다 모이는 우물가에서건, 느릅나무는 우리 곁을 지켜왔다. 대들보나 기둥 따위로 혹은 울타리 나무로 우리의 집이 되었고, 마을을 드나드는 다리도 느릅나무로 엮었다. 수분이 많고 부드러운 속껍질은 전분이 많아 가난한 이들의 구황식품이었다. 고구려 평강공주가 찾아왔을 때, 집을 비웠던 온달은 느릅나무 속껍질을 채취하러 나갔다(<삼국유사>)고 했다. 조선시대의 <구황촬요>는 백성들이 비축할 비품으로 느릅나무 껍질을 앞에 꼽았다. 속껍질과 잎은 쪄서 먹고, 열매는 술이나 장을 담글 때 썼다. 특히 느릅나무는 각종 약재로 쓰였다. <동의보감>은 ‘배설을 도와주고, 위장의 열을 없애며 부은 것을 가라앉힌다’고 했다. 그 진액은 뱃속의 염증을 없애고, 장 기능을 개선하고, 각종 부종을 가라앉히며, 알레르기성 피부염이나 습진, 무좀 그리고 여드름에도 효과가 있다고 하니, 백성의 응급약이었다.
새순을 갈아 먹으면 숙면을 할 수 있다고도 했으니, 박목월 시 속의 자하산 청노루의 눈이 그렇게 맑을 수 있던 것은 느릅나무 새순 덕이었을 것이다. 소의 코뚜레를 느릅나무로 쓴 것은 상처를 쉽게 낫게 하고 새살을 돋게 하는 덕성 때문이었다. 게다가 어디서나 자라는 것이 꼭 민초를 닮았다. 습기 많은 비옥한 땅을 좋아하지만, 표토가 부족한 암반층에서도 잘 자라고, 양지·반양지 가리지 않는다. 웬만큼 수피를 벗겨도 놀라운 복원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당대의 문장가 한유는 엽전 모양의 느릅나무씨가 바람에 날리는 것을 보며, 가난한 이웃들의 시름을 떠올렸을 것이다. “느릅나무 생울타리에서 파란 동전 흩뿌리네/ 그 돈이 마당에 가득하지만, 가난을 면할 길이 없구나” 강원도 정선 사람들은 씨가 많이 맺히면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
양방이 밀려오면서 잊혔던 느릅나무의 덕성을 세상에 다시 알린 것은 이환용 평강한의원 원장의 덕이 컸다. 7전8기 재수 시절부터 돌팔이 한의사로 통했던 그는 서울 노량진 좌판 할머니들과 학원 선생님의 아픈 곳을 돌봐주며 생활도 하고 공짜로 수강했다. 이때 맺은 한복집 할머니와의 인연으로 ‘코나무’로 통하는 참느릅나무를 알게 됐고, 훗날 한의사가 되어 느릅나무의 약성을 바탕으로 개발한 비염 치료제 청비환은 그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지난해에는 아토피형 피부질환 치료제 아토순을 개발했다. 해진 살을 되살아나게 하고, 몸의 열을 내려주며, 몸속의 노폐물을 빨아내거나 배출을 촉진해 체질을 개선하는 느릅나무의 약성을 이용한 것이었다. 의대생까지 목숨을 끊게 하고, 30대 주부가 6살 딸의 극심한 아토피 때문에 동반자살한 것이 개발의 자극이 되었다. 세계 인구의 20%가 각종 아토피성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아토순은 지난해 ‘메디컬 아시아 2013 제6회 대한민국 글로벌 의료서비스 대상’을 수상했다.
느릅나무로 하여 가난을 벗어나자 시작한 일이 어릴 적 친구들과 뛰어놀던 고향(충남 서산시 운산면) 뒷산을 생태적으로 재현하려는 것이었다. 1997년부터 이미 번 돈, 그리고 장래 벌어들일 돈까지 쏟아부어 경기도 포천에 평강식물원을 조성했다. 부인(원영옥 부원장)의 총괄 아래 국내 최고의 전문가들을 모시고, 자신은 비용을 만드는 일만 맡았다. 그런데 일단 손을 대고 보니, 유실수와 꽃나무로 뒷동산을 재현하는 데 그칠 일이 아니었다. 너도나도 나서던 화려한 꽃 중심의 원예 식물원을 하나 더 보탤 일도 아니었다. 한택식물원, 자생식물원 등 생태식물원을 추구하되, 이들과도 다른 것이어야 했다.
그래서 평강만의 암석원, 이끼원, 고사리원, 고층습원, 고원습지까지 포함시키기로 했다. 암석원은 일반 산지를 2m 정도 파고 마사토, 모래, 자갈 그리고 바위 등으로 고산지대와 비슷한 환경을 만들고, 그 속에 풍혈을 뚫어 통수는 물론 통풍이 원활하고 습도가 조절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노랑만병초, 에델바이스, 넌출월귤, 섬백리향, 바위솔 등 백두산이나 히말라야, 알프스에 사는 고산식물이 그래야 살 수 있었다. 지금 그곳엔 수목한계선 이상에서 서식하는 고산식물은 1000여종에 이른다.
이끼원 조성 때는 연구자를 뉴질랜드에 보내 다양한 이끼의 생존 조건을 연구하게 한 뒤 계곡에 바위를 채우고 온습도 유지 장치를 가설했다. 고층습원과 고원습지는 인제의 대왕늪을 재현하는 것이니 암석원 못지않게 힘들었다. 이탄층을 깔고, 계곡물을 끌어들이고, 온도와 일조량을 맞춰야 했다. 멸종위기종인 개병풍, 노랑만병초, 단양쑥부쟁이, 독미나리, 조름나물 등이 서식하게 됐고, 서식지 외 보전기관으로 지정된 것은 그런 정성 때문이었다. 김규동 시인의 고향마을 고샅 같기도 하고, 박목월 시인의 이상향 같은 동산은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개장하던 2006년 노무현 대통령이 문득 식물원에 들렀다. 그는 이 원장으로부터 느릅나무 이야기를 듣고는 당신의 기억 하나를 풀어놓았다. 일하다 다리를 크게 다친 아버지가 다른 소리 하지 않고 그저 느릅나무 껍질을 구해 오라고 하더란다. 어찌어찌 물어 참느릅 뿌리 껍데기를 가져왔더니, 그것을 짓찧어 개어 붙인 뒤 헝겊으로 싸매고 며칠 지나지 않아 헝겊을 풀어보니 새살이 돋아났더라는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마침 그곳에 자생하던 느릅나무한테 가보자고 성화였다고 했다.
그러나 일반인의 눈에는 여느 뒷동산이나 다를 게 없는 식물원이었다. 세계의 60여개 식물원과 종자 교환 협정을 맺을 정도였지만, 모르는 이의 눈에는 그 나무에 그 풀이었다. 암석원은 뙤약볕 내리쬐는 돌밭이었고, 고사리원과 이끼원은 을씨년스럽고, 고층습원 습지는 웅덩이로만 비치더란다. 사시사철 형형색색의 꽃과 나무를 기대하며 찾아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건데….’
그러다 보니 조성에서 유지까지 이 원장이 충당해야 할 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국립수목원장도, 김문수 당시 경기도지사도 만나기만 하면 옆에서 걱정만 할 뿐이었다. 한의원 수입으로 근근이 이어가던 중 2008년 초 한의원이 세무조사에 막대한 추징까지 당했다. 추징금 마련을 위해 급전까지 쓰다 보니 이젠 가계마저 휘청인다. 유지하자니 집안 살림조차 거덜나고, 접자니 생태식물원의 이상을 이어줄 사람은 찾기 어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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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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