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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이림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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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의 향원익청
진평왕릉은 황복사지 3층 석탑과 마주보고 있다. 들판 가운데 보문사지 당간지주, 석조, 연화문 당간지주 등만 마음에 두고 거닐면 된다. 마침 남단의 거북이 닮은 동산(보갓산)에 이르면, 그 목덜미쯤의 수오재에서 목도 축이고, 생각도 쉴 일이다 “‘나’란 나와 굳게 맺어져 있어 떨어질 수 없는 것인데, 굳이 지키지 않더라도 어디로 가겠는가. (큰형님이 당호를 수호재라 한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다산이 귀양살이하며 쓴 산문 ‘수오재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러나 의문은 곧 풀린다. “… 천하에 나보다 더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없다. 어찌 … 나를 굳게 지켜야 하지 않을까.” 유홍준 선생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정양모 전 중앙박물관장의 이야기를 빌려 이렇게 말했다. “경주를 알려면 모름지기 진평왕릉, 장항리 절터를 가보고, 성덕대왕신종 치는 소리를 직접 들어보라.” 경주의 155개 고분 중에서 굳이 진평왕릉을 꼽은 까닭은 이렇다. “왕릉으로서 위용을 잃지 않으면서도 소담하고 온화한 느낌을 주는 고분은 진평왕릉뿐이다. 또 있다면 그의 딸 선덕여왕릉이 비슷하다.” 두 선생은 생략했겠지만, 보탤 게 있다. 좌정하면 보인다. 불국토 남산을 안산으로 삼고, 동쪽으로는 명활산이 첩첩한 토함산 연봉으로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낭산, 단석산, 선도산 자락이 물결친다. 그 사이 보문 들판과 산언저리엔 옛 신라 격변기의 부침이 곳곳에 드러나 있고, 영웅호걸들의 야망과 도전, 성공과 실패, 좌절과 소멸이 퇴적돼 있다. 거기 흐르는 것은 신라 천년 영고성쇠의 파노라마요, 응시하는 자는 그 속에서 ‘역사의 선정’에 든다. 당대의 권력을 치마 속에 희롱했던 미실, 통일의 초석을 닦은 진평왕, 그 뒤를 이은 이 땅의 첫 선덕여왕, 비담이나 석품 등 야심가의 반란, 대업을 이룬 문무왕과 신문왕 부자가 있다. 그리고 저를 잃고 모든 것을 잃은 효공왕 또한 그곳에 있다. 귀 기울이면 월명사의 피리 소리도 흐른다. 그리고 권력의 억압 속에 고단했던 민중의 염원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보문 들녘은 그렇게 만추의 절정의 아름다움을 넘어 인간사 무상의 이치를 새겨 놓았다. 모든 시작이 그러했듯이, 이야기는 영웅호걸을 희롱했던 여인에게서 출발해야겠다. 진평왕을 포함해 세 왕(진흥왕, 진지왕), 신라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를 네명(사다함, 세종, 설화랑, 미생랑)이나 치맛자락에 휘어 감은 미실이다. <화랑세기>는 그의 미색을 이렇게 전한다. “백가지 꽃의 영겁이 뭉쳐 있고 세가지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았다.” 진흥왕의 태자 동륜을 사로잡았고, 그 아비도 맥을 못 추게 했으며, 동륜의 동생 금륜(진지왕)마저 노리개 삼았다. 금륜이 즉위 후 2년 만에 세상을 뜨자, 이번엔 진평왕마저 품었다. 그의 품을 못내 그리워하던 6대 풍월주 사다함은 미실이 떠난 것을 알고는 원망에 사무쳐 죽었다. 하지만 누가 그에게 돌을 던질까. 왕족들은 대원신통이라 하여 여성을 성적 노리개로 곁에 두었으니, 미실이야 그들을 농락함으로써 복수를 한 셈이니 그 또한 영웅. 진평왕마저 그 치마폭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신라 역사는 바뀌었을 터. 통일 대업의 초석을 놓거나, 이 땅에 첫 여왕(선덕왕)을 세우기는커녕, 초년에 비명횡사했을 것이다. 진평왕은 저를 지키도록 한 불심이 깊었다. 누운 이리처럼 낭산은 낮고 갸름하고 길다. 하지만 숲은 깊어 신들이 노닐 만했다. 하여 신라인들은 신유림이라 했고, 불가에선 수미산이라 했으며, 산마루엔 도리천을 두었다. 생전 그곳에 유택을 두도록 한 이는 선덕여왕. 왕위에 오르자 아찬 석품 등이 ‘아녀자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며 난을 일으켰고, 김춘추·김유신을 앞세워 왕권 강화에 나서자, 상대등(총리급) 비담이 난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높은 품격의 유머와 식견으로 섣부른 남정네들의 도전을 굴복시켰다. 전설처럼 내려오는 여근곡 정벌 뒤 신하들은 이렇게 물었다. “여근곡에 매복해 있던 백제군이 궤멸될 줄 어떻게 알았습니까?” “남근입어여근, 필즉사의(男根入於女根, 必卽死矣)라.”(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 줄 모르시나.) 여왕의 기를 죽이려다 남자들은 즉사했다. 저를 짝사랑하다 상사병에 걸린 지귀가 불탑 밑에서 그만 잠든 것을 보고는 그 가슴에 저의 팔찌를 놓고 가기도 했다. 도리천은 울창한 송림에 가려져 있다. 무엇으로도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 그저 달항아리처럼 덩두렷해, 달빛에 젖으면 달이 되고, 별이 내리면 은하수 흐르는 밤하늘이 된다. 그런 밤이면 남쪽으로 지척인 사천왕사지에서, 1300여년 전 달 운행까지 멈추게 했다는 월명사의 피리 소리가 들릴 법도 하다. 낭산 허리께 산기슭엔 문무왕의 주검을 화장했다는 능지탑이 있다. 지금은 기단과 1층 탑신만 남아 있지만 그 뜻만큼은 여전히 성성하다. “서쪽을 정벌하고 북쪽을 쳐서 능히 강토를 평정하고… 창고에는 곡식이 산처럼 쌓이고 감옥은 텅 비어 풀이 무성해졌으니, 어느 한 곳 부끄러움이 있을 리 없”(유언)었던 문무왕이었다. 그러나 생전 지의법사에게 말했듯이 “나는 세상의 영화에 염증을 느낀 지 오래”된 인물이었다. “좋지 않은 응보로 말미암아 (죽어서) 짐승이 된다면 또한 나의 생각과 꼭 맞는 것이오.” 유언은 이렇게 이어진다. “나라를 다스리던 영주도 마침내 한 무더기 흙무덤이 되어, 나무꾼과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여우와 토끼들은 그 곁에 구멍을 뚫고 사니, (능이란) 한갓 재물만 허비하고, 헛되이 사람만 고되게 하고, 죽은 사람의 넋을 구제하지 못한다. 죽고 나면 화장하라. 검소하게 화장하라.” 선덕여왕릉 남쪽 오리쯤엔 문무왕 아들 신문왕 무덤이 있다. 신문왕 역시 도전에는 단호했고, 저를 지키는 데 엄격했다. 장인 김흠돌까지 반란죄로 처단하며 왕권에 대한 위협을 제거했다. 687년 종묘에 올린 제문에서 이렇게 고한다. “근자에 정의가 하늘의 뜻과 달라, 천문에 괴변이 나타나고 해와 별은 빛을 잃어가니, 무섭고 두려움이 마치 깊은 못이나 계곡에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를 다스리기 위한 그의 염원은 칼이 아니라 음악적 조화였다. ‘소리만으로 적병이 물러나고 병이 나으며, 가물 땐 비가 오고 비가 올 때는 맑아지는 피리’, 만파식적이었다. 낭산 동북단의 황복사지 3층 석탑. 신문왕은 아비의 뜻에 따라 주검을 화장하고 유해를 동해 돌섬에 수장한 뒤, 감포에서 서라벌로 넘어오는 길목에 감은사를 지었다. 신문왕의 아들 효소왕은 그 아비를 기억하기 위해, 서라벌로 들어오는 길목에 탑을 세웠다. 이 탑은 진평왕릉과 마주보고 있다. 이제 그 사이 들을 거닐며 흩어진 삶과 욕망과 허망의 흔적을 더듬을 일이다. 유적, 유구는 곳곳에 드러나 있거나 묻혀 있으니 애써 찾을 필요도 없다. 들판 가운데 보문사지 당간지주, 석조, 연화문 당간지주 등만 마음에 두고 거닐면 된다. 마침 남단의 거북이 닮은 동산(보갓산)에 이르면, 그 목덜미쯤의 수오재에서 목도 축이고, 생각도 쉴 일이다. 집들은 헐려버릴 한옥 고가 4채를 영광 등지에서 옮겨 지은 것이니, 들보며 기둥이며 대청이며 처마 끝자락까지 애틋하다. 당호인 수오재 또한 예사롭지 않다. “‘나’란 나와 굳게 맺어져 있어 떨어질 수 없는 것인데, 굳이 지키지 않더라도 어디로 가겠는가. (큰형님이 당호를 수호재라 한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다산이 경상도 장기에서 귀양살이하며 쓴 산문 ‘수오재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러나 의문은 곧 풀린다. “내 밭을 지고 달아날 자가 있는가, 집은 지고 달아날 자가 있는가, 꽃과 나무를 뽑아갈 자가 있는가. … 그러나 나라는 것은 달아나서 드나드는 데 일정한 법칙이 없다. 이익으로 꾀면 떠나가고, 위험과 재앙이 겁을 주어도 떠나가고, 단순호치의 미인만 보아도 떠나간다. 한 번 가면 돌아올 줄을 모르니, 천하에 나보다 더 잃어버리기 쉬운 것이 없다. 어찌 … 나를 굳게 지켜야 하지 않을까.” 수오재 너머엔 효공왕릉이 있다. 49대 헌강왕이 사냥에서 돌아오다 본 여인과 합하여 낳은 서자다.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정강왕, 진성여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52대 왕에 올랐다. 즉위 초 흔들리던 국기를 다잡으려 했지만, 내부는 썩을 대로 썩었고, 궁예의 후고구려와 견훤의 후백제가 이미 정립한 터. 효공은 애첩에 빠졌고, 신하들은 애첩을 살해했다. 왕은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저를 잃고 애첩을 잃고, 목숨마저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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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병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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